무왕 별궁 궁남지, 홍수련·백수련·황수련 물결

부소산에 오르면 삼천 궁녀 전설 깃든 낙화암이

성흥산 정상 수령 400년 넘는 사랑나무서‘인생샷’

 

고대 백제도시는 역사 속에서나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사라지고 터만 남겨져 있으며, 박물관에 보관된 작은 유물들을 통해서만 백제라는 나라를 가늠해볼 수 있을 정도다.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게 있다면 백제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금강일 것이다.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 사비로 천도할 때도 이 물길을 따라 이동했다. 부여에서는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용을 낚아올렸다 하여 금강을 백마강이라 부른다. 이 백마강을 따라 세워진 천년도시 부여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사비백제의 심장부다. 따라서 금강을 따라 이어지는 부여 여행은 자연스레 1,400여년 전 사비백제로 들어가는 시간여행 길이다.

성흥산 사랑나무는 해 질 녘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성흥산 사랑나무는 해 질 녘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부여는 백제 궁궐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도시다. 지금도 궁궐터부터 후원·사찰 등 유적지 대부분이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길을 따라가면 부여를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부여 여행은 왕의 정원인 궁남지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정원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제30대 무왕이 즉위 35년(634년)을 맞아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 채우고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의 궁남지는 1967년에 복원한 것으로, 왕이 배를 타고 다니던 원래 연못의 일부라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궁남지는 계절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궁남지 하면 한여름에 피는 연꽃이 가장 유명하지만, 한여름 더위를 피해 이맘때 수련을 보러 오는 이들이 더 많다. 홍수련·백수련·황수련·열대수련 등 각종 수련이 연못을 수놓고 있다. 왕의 별궁이었던 이곳이 아침저녁 인근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애용되면서 이제는 부여 군민들의 쉼터로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연못 한가운데 다리로 연결된 정자 포룡정에 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 

‘한국의 정원기행’을 쓴 인문여행가 김종길은 책에서 ‘옛 선비들은 조용히 시를 읊조리며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그것을 ‘미믐완보(微吟緩步)’라 했다. 풍경을 읽는 느긋한 마음은 느린 걸음에서 시작된다. 느릿하게 걸으며 나직이 읊조리는 것에서 정원 관람은 시작된다’고 했다. 그의 조언 대로 느릿한 걸음으로 정원을 둘러보다 보면 시끄러운 세상일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겠다.

궁남지 연못 위로 홍수련과 백수련·황수련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궁남지 연못 위로 홍수련과 백수련·황수련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궁남지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부소산이고 그 아래가 백제의 마지막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유적이다. 부소산성은 왕궁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사비백제 최후의 보루인 셈인데, 흙으로 쌓아올린 토성이라 돌로 쌓은 석성과 달리 그 흔적이 흐릿하다. 부소산에 올라가면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낙화암과 부여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반월루로 이어진다. 낙화암 옆 백화정에서는 주민들이 부르는 ‘꿈꾸는 백마강(이인권 노래)’ 노랫소리를 들으며 풍류를 즐길 수 있다. 낙화암에서 천년고찰 고란사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따라가면 고란사 선착장에서 나룻배를 타고 산 반대편 구드래나루터로 갈 수도 있다.

다음 행선지는 나성이다. 부소산성에서 성곽 길을 따라 걸어가면 2시간 거리이지만 차로 가면 20분이면 갈 수 있다. 부소산성이 궁궐을 둘러싼 도성이라면 나성은 백제의 수도방어를 위한 동쪽 외곽 방어시설이다. 부소산성과 마찬가지로 토성으로 세워져 대부분이 유실된데다 도로가 뚫리면서 군데군데 끊어져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다. 성 그 자체보다는 나성 바깥쪽 왕실 무덤인 능산리고분군과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절터 능산리사지가 붙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궁남지 연못 한가운데에 다리로 연결된 포룡정.
궁남지 연못 한가운데에 다리로 연결된 포룡정.

 

백제 도성의 동쪽을 나성이 지키고 있다면 남쪽을 지키는 곳은 가림성이다. 읍내에서 부여대교를 건너 30분쯤 가면 성흥산 정상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가림성은 석성이지만 성 자체를 복원하는 데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아 볼거리는 많지 않다. 부소산 보다 두 배는 더 높은 곳이지만 산 중턱까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다시 걸어 올라가야만 성흥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산 정상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요즘 부여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성흥산 사랑나무다. 포토존으로 유명해지면서 주말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줄이 생기기도 한다. 

궁남지 연못 위로 홍수련과 백수련·황수련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궁남지 연못 위로 홍수련과 백수련·황수련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문화재가 된 돌담길따라 동네 한바퀴~

전국 어느 고장이나 지역 출신 유명인사가 있기 마련이다. 부여에는 백제만큼이나 유명한 인물도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풍운의 정치인’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다. 

JP의 생가는 부여에서도 서쪽 제일 끝에 위치한 외산면 반교리(盤橋里)에 있다. 아미산을 경계로 산을 넘어가면 충남 보령이고, 산 아랫마을이 반교리다. 하지만 요즘 반교리가 다시 주목받는 건 JP의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이 마을을 수백년간 지키고 있는 돌담 때문이다.

부여 읍내에서 부여대교를 건너 40번 지방국도를 따라 차로 20여 분을 달리면 반교리다. 마을 입구에는 작은 개천 위로 반교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야만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다리 건너에는 잔디가 넓게 깔린 익숙한 모습의 건물이 나오는데, 1999년 폐교한 반교국민학교를 개조해 만든 유스호스텔이다. 유스호스텔 담벼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반교리 돌담길의 시작이다. 

돌담길은 뚜렷한 경계 없이 시작돼 마을 안쪽으로 이어진다.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미로처럼 동네 곳곳으로 끝없이 연결돼 같은 곳을 몇 바퀴나 돌게 된다. 유일하게 담이 끊어지는 부분은 어김없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집마다 대문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곳의 돌담은 제주 돌담과는 또 다르다. 제주 돌담은 돌과 돌 사이에 바람구멍이 나 있지만 이곳은 작은 돌과 흙으로 구멍이 메워져 있다. 조선 시대부터 쌓기 시작했다는 돌담은 산 너머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집으로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면 돌이 많이 나와 담으로 쌓았다는 설이 있는데 둘 다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마을의 한 주민은 “예전에는 남의 집을 통과해야만 마을을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길이 좁아 내 집처럼 이웃집을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동네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때문이다. 유 전 청장이 재임하던 2006년 문화재청은 반교마을 돌담길을 등록문화재(제280호)로 지정했다. 그는 같은 해 숙원이던 ‘5도2촌(도시에서 5일, 촌에서 2일 거주)’을 실현하기 위해 반교리에 ‘휴휴당(休休堂)’을 짓고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이 동네 제일 안쪽 집이 유 전 청장의 집이다. 

<글·사진(부여)=최성욱 기자>

반교리 돌담은 바닷가 마을과 다르게 바람이 통하지 않게 촘촘히 쌓여 있는 게 특징이다.
반교리 돌담은 바닷가 마을과 다르게 바람이 통하지 않게 촘촘히 쌓여 있는 게 특징이다.

 

 

 

 

 

 

<글·사진(부여)=최성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