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김성희 부동산
첫광고
이규 레스토랑

[수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04-09 11:29:35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이메일을 열어보니 '우리 엄마가 책을 냈어요.'라고 쓴 켈리의 메일이 있었다. 켈리는 십 년 전 즈음에 돌아가신 신 할머니의 외손녀다. 할머니 막내딸이 동화를 쓴다더니 책을 출판했나 보다. 책을 주문하려고 작가 이름과 타이틀을 옮겨 쓰려니 할머니와 함께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신 할머니는 혼자서 양로원을 찾아왔던 분이다. 삶의 끝머리를 스스로 정리하겠다며 혼자 찾아오는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할머니라고 불렀지만 그 당시 일흔 살을 갓 넘긴 아주 세련된 여성이었다. 가장 노릇하며 사느라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여유도 없이 살아온 할머니가 암을 얻은 것은 삼 년 전이라고 했다. 삶의 끝자락을 누구의 동정이나 방해 없이 정리하고 싶어 스스로 양로원을 찾았다고 했다. 키모데라피도 중단했다고 했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말하는 할머니에게 죽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미래처럼 보였다. 

 

살다 보면 그냥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눈만 마주쳐도 서로 생각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 신 할머니는 처음 입소할 때부터 그런 분이었다. 남들 눈에 차별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사적인 감정을 감추려고도 해 봤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입소할 때 두 달 정도 살 거라던 의사의 진단과 달리 할머니는 일 년 넘게 더 사셨다. 그의 마지막 생애를 함께 하는 동안, 할머니의 임종은 내가 곁에서 꼭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유한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시한부 삶이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맞닥뜨리면 반응이 정말 제각각이 된다. 신 할머니는 마치 해야 할 일에 우선순위를 설정해 놓았던 것처럼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나갔다. 불륜을 용서하지 못해서 이혼했던 남편, 그 때문에 깨진 가정과 관계들 그리고 사이가 멀어졌던 딸들에게 진실한 감정을 보여주었다. 숨 쉬고 있는 순간에도, 잠자리에 드는 행동에도, 한 코 두 코 뜨개질을 하면서도 자신이 느끼는 내적 평화를 감사해했다. 

 

잠자는 듯 떠나기를 소원했던 할머니는 그 희망대로 그렇게 떠났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 곁에 있기를 바랐었지만,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겨 모두 잠든 시간에 홀로 떠났다. 아침 라운딩에 방문을 열었을 때 할머니는 양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마치 행복한 꿈을 꾸는 것처럼 누워있었다. “아! 천사 같다.” 하고 감탄할 정도로 평온해 보이던 표정은 내게 슬퍼하지 말라고 남겨준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신 할머니는 양로원을 개원한 이래 자신의 방에서 임종한 최초의 할머니였다. 사실, 양로원에서 임종을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임종이 며칠 사이로 가까워지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다. 그 이유는 안락하게 고통 없이 임종을 맞게 하려함이지만, 자녀와 지인들이 환자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양로원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들에게 생존의 모습을 기억에 남기는 것이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 되는 일이기도 하다. 

 

호스피스의 선구자인 닥터 퀴불러 로스의 이론에 ‘죽음의 5단계’ 가 있다. 죽음이나 암 선고처럼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사실로 받아들이기까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 할머니는 타협과 수용의 단계만 거쳤던 것 같다. 삶의 모습과 죽음을 대하는 모습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할머니,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 지, 의지력과 자율성, 지성과 존엄, 관계와 배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닌 가치의 중요함을 깊이 깨닫게 해 주셨다. 

 

십년 세월이 흘렀지만, 가끔씩 신 할머니가 생각날 때가 있다. 함께 털실을 사러갔던 상점을 지나칠 때, 새우 물만두를 시켜 먹을 때, 찻집에서 매실차를 시킬 때. 할머니와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한다. 돌아보니 그때 할머니 나이가 고작 일흔 하나, 지금 같으면 ‘아가씨’ 소리 들을 나이에 작고하신 거였다.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관련 기사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추억의 아름다운 시] 발자국

정호승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듯이발자국도 따라가 별이 되는가내가 남긴 발자국에 핀 민들레는해마다 별이 되어 피어나는가 내 상처에 깊게 대못을 박고멀리 길가에 내던져진나의 손에는 깊

[수필] 빈 잔으로는 누구의 갈증도 채울 수 없다
[수필] 빈 잔으로는 누구의 갈증도 채울 수 없다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도대체 왜 이래요?”점심시간,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접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강 할머니가 계신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서브디비전 주택, 편리함 뒤에 숨은 규칙과 보험의 차이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서브디비전 주택, 편리함 뒤에 숨은 규칙과 보험의 차이

최선호 보험전문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처럼, 사람은 혼자보다 함께 살아갈 때 더 많은 편리함과 안전을 누리게 된다. 미국 주거 문화에서도 이러한 공동체 개념이 잘 드

[애틀랜타 칼럼] 목표가 있어야 행운도 있다

이용희 목사 행운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이란 커다란 지도에 흩뿌려져 있습니다. 당신이 아직도 행운을 잡지 못한 것은 명확한 인생의 지도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독자기고] 저물어 가는 미 제국의 패권
[독자기고] 저물어 가는 미 제국의 패권

김대원(애틀랜타 거주) 4월 초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선언했으나 6주가 지난 지금 전쟁의 양상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다급해진 트럼프 대통령은 이슬라

[법률칼럼] 학생비자 심사 강화, ‘재정’이 핵심이 된 이유

미국 학생비자 심사 기준이 자금의 액수보다 '재정의 신뢰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강화되었다. 영사과는 단순 잔액 증명 대신 자금의 형성 과정과 지속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며, 특히 인터뷰 직전의 거액 입금이나 불분명한 제3자 지원은 거절 사유가 될 수 있다. 성공적인 비자 취득을 위해서는 최소 6개월 이상의 자금 흐름 확보와 학교 선택의 논리적 타당성을 갖춘 통합적인 준비가 필수적이다.

[행복한 아침] 흐르는 것은

김 정자(시인 수필가)         한 낮 기온이 여름으로 들어선 것 같은 한나절, 처타후치 강변을 찾았다. 강줄기는 넓은 강폭 따라 잔잔한 물결을 일구며 흘러가고 있다. 강 자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3)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3)

“재정전문가도 결국 SSA 공식자료로 돌아가야 한다” 천경태 (금융전문가) •공식 확인일: 2026년 3월 30일 (자료 출처: Social Security Administrati

[신앙칼럼] 호르무즈와 예수 그리스도(Hormuz and Jesus Christ, 요한복음 John 20:31)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요한복음 20:31의 생명으로 영적 제해권(制海權)을 선포하라 호르무즈와 예수 그리스도(Hormuz and Jesus Christ)는 ‘

[삶과 생각] 미쉘 강 후보
[삶과 생각] 미쉘 강 후보

지천(支泉)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4월 21일 청담에서 미쉘 강 후보 후원회가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이다.지난 선거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안타깝게 석패한 미쉘 강 후보가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