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첫광고
김성희 부동산
이규 레스토랑

[수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04-09 11:29:35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

권순상 노흥성 부동산 470-218-6136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이메일을 열어보니 '우리 엄마가 책을 냈어요.'라고 쓴 켈리의 메일이 있었다. 켈리는 십 년 전 즈음에 돌아가신 신 할머니의 외손녀다. 할머니 막내딸이 동화를 쓴다더니 책을 출판했나 보다. 책을 주문하려고 작가 이름과 타이틀을 옮겨 쓰려니 할머니와 함께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신 할머니는 혼자서 양로원을 찾아왔던 분이다. 삶의 끝머리를 스스로 정리하겠다며 혼자 찾아오는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할머니라고 불렀지만 그 당시 일흔 살을 갓 넘긴 아주 세련된 여성이었다. 가장 노릇하며 사느라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여유도 없이 살아온 할머니가 암을 얻은 것은 삼 년 전이라고 했다. 삶의 끝자락을 누구의 동정이나 방해 없이 정리하고 싶어 스스로 양로원을 찾았다고 했다. 키모데라피도 중단했다고 했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말하는 할머니에게 죽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미래처럼 보였다. 

 

살다 보면 그냥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눈만 마주쳐도 서로 생각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 신 할머니는 처음 입소할 때부터 그런 분이었다. 남들 눈에 차별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사적인 감정을 감추려고도 해 봤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입소할 때 두 달 정도 살 거라던 의사의 진단과 달리 할머니는 일 년 넘게 더 사셨다. 그의 마지막 생애를 함께 하는 동안, 할머니의 임종은 내가 곁에서 꼭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유한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시한부 삶이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맞닥뜨리면 반응이 정말 제각각이 된다. 신 할머니는 마치 해야 할 일에 우선순위를 설정해 놓았던 것처럼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나갔다. 불륜을 용서하지 못해서 이혼했던 남편, 그 때문에 깨진 가정과 관계들 그리고 사이가 멀어졌던 딸들에게 진실한 감정을 보여주었다. 숨 쉬고 있는 순간에도, 잠자리에 드는 행동에도, 한 코 두 코 뜨개질을 하면서도 자신이 느끼는 내적 평화를 감사해했다. 

 

잠자는 듯 떠나기를 소원했던 할머니는 그 희망대로 그렇게 떠났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 곁에 있기를 바랐었지만,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겨 모두 잠든 시간에 홀로 떠났다. 아침 라운딩에 방문을 열었을 때 할머니는 양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마치 행복한 꿈을 꾸는 것처럼 누워있었다. “아! 천사 같다.” 하고 감탄할 정도로 평온해 보이던 표정은 내게 슬퍼하지 말라고 남겨준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신 할머니는 양로원을 개원한 이래 자신의 방에서 임종한 최초의 할머니였다. 사실, 양로원에서 임종을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임종이 며칠 사이로 가까워지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다. 그 이유는 안락하게 고통 없이 임종을 맞게 하려함이지만, 자녀와 지인들이 환자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양로원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들에게 생존의 모습을 기억에 남기는 것이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 되는 일이기도 하다. 

 

호스피스의 선구자인 닥터 퀴불러 로스의 이론에 ‘죽음의 5단계’ 가 있다. 죽음이나 암 선고처럼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사실로 받아들이기까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 할머니는 타협과 수용의 단계만 거쳤던 것 같다. 삶의 모습과 죽음을 대하는 모습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할머니,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 지, 의지력과 자율성, 지성과 존엄, 관계와 배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닌 가치의 중요함을 깊이 깨닫게 해 주셨다. 

 

십년 세월이 흘렀지만, 가끔씩 신 할머니가 생각날 때가 있다. 함께 털실을 사러갔던 상점을 지나칠 때, 새우 물만두를 시켜 먹을 때, 찻집에서 매실차를 시킬 때. 할머니와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한다. 돌아보니 그때 할머니 나이가 고작 일흔 하나, 지금 같으면 ‘아가씨’ 소리 들을 나이에 작고하신 거였다.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관련 기사

댓글 0개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시] 소식 없이 온 가을
[내 마음의 시] 소식 없이 온 가을

헬렌김 그렇게 뜨거웠던 어제도아무런 작별 인사 없었는데,오늘은소식없이 가을입니다. 공원에는 다람쥐가 분주하고한 여름 푸르렀던 나무들은파스텔을 거두어하나 둘 황금빚 옷을 준비합니다 

[애틀랜타 칼럼] 체면을 살려 주어라

이용희 목사 대개 윗사람들은 아랫사람을 대할 때 하인 다루듯이 명령하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할 때. 그 자신의 인격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법률칼럼] 취업비자 10만 달러의 벽… 이제는 회사의 해고 기록까지 본다

케빈 김 법무사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취업을 준비하는 유학생에게 채용 제안은 새로운 출발이다. 그러나 지금은 취업의 기쁨에 앞서 비자 정책의 불확실성부터 따져야 한다.지난 9월

[행복한 아침] 가을 달 빛이 가장 좋은 밤

김 정자(시인 수필가)   바람결도 싱그러운 가을 밤이다.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어쩔 수 없이 고국, 고향으로 마음이 달려간다. 명절 속에 잠재워져 있었던 일가친척, 이웃, 동무들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25)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25)

SSI 생계보조금 50년 만의 대수술 예고: 자산 한도 1만 달러 상향과 은퇴계좌 5만 달러 면제사회보장국 수리통계국 공식 추산: 3,160억 달러 투입과 수급 자격 대폭 완화 개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소프라노 김현정 독창회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소프라노 김현정 독창회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Duluth 120 Hway Rd 선상의 미국인 “제일 침례교회”에서 지난 토요일 오후 4시에 소프라노 김현정의 독창회가 있었다. “노래는 본래

[신앙칼럼] 가을이 들려주는 소리: 창조의 파도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Listen to the Waves of Creation! (로마서 Romans 11:36) 시인 윤동주는 시 <바다>에서 이

[삶과 생각] 독서의 계절 가을
[삶과 생각] 독서의 계절 가을

지천(支泉)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70년 전 한국에서 중·고등학생 시절 가을이 오면 국어 선생님은 “가시리 가시리 잇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버

[추억의 아름다운 시] 옹달샘

서정태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질마재 몰랭이그 어디쯤 해서옹달샘이고 싶다 미침 바람이 불어싸도물결이 일지 않는그저 조용하기만 다만한자락 바람이 쉬어가고밤이면 몇 개 별이 적시는옹달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면 보험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면 보험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

최선호 보험전문인 미국에서는 성인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독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부모 집으로 다시 돌아와 함께 사는 자녀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를 흔히 **'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