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 A사는 최근 경쟁 관계인 국내 한 대기업의 협력 업체에 연락해 이 업체가 생산한 신소재를 대량으로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이 업체가 국내 대기업에 납품하는 정확한 ‘샘플’을 보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우리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이 곤란한 경우 협력 업체를 통해 타깃 기업에 납품한 샘플 등을 우회적으로 확보하는 수법”이라고 설명했다.
21일 업계와 국정원에 따르면 우리 인력과 기술을 빼가기 위한 경쟁 국가와 기업들의 수법이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특히 중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년 내 한국을 넘어서겠다는 목표로 국가적 역량을 결집시키고 있다. 국정원이 최근 전문 평가 기관 등과 함께 조사한 결과 주요 업종별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는 조선 5.3년, 반도체 5년, 2차전지 2~4년, 디스플레이 2년, 자동차는 1년 미만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법도 가지각색 기술 탈취 5가지 유형
기술을 빼가는 수법 역시 가지각색이다. 국정원과 업계 전문가들은 우리 기술을 탈취하는 수법을 크게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경쟁국 기업의 자회사 또는 외견상 그와 무관한 기업체로 위장해 국내 우수 인력을 빼돌리는 것이다. 최근 이 같은 방식으로 유럽의 배터리 업체 노스볼트가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업계의 인력을 영입하려다 적발됐다.
이 밖에도 △국내 업체 내부에 조력자 확보 △협력 업체에 접근해 납품 샘플 요구 △리서치 업체를 통해 반공개적 정보 수집 △산학 협력을 명목으로 기업 자료 요청 등의 수법이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중국의 한 기업이 국내 리서치 업체에 거액의 컨설팅 비용을 지급하고 국내 대기업의 핵심 제품 생산과정 노하우를 수집해달라고 의뢰한 사건도 있었다. 이 리서치 업체는 해당 분야에서 수십 년간 축적한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우리 기업의 비공개 정보를 입수한 후 이를 경쟁국 기업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통상적인 용역 비용의 5~10배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한 극히 이례적인 일로, 이 정도 규모의 일이라면 소요 기간이 최소 3년 이상 필요한 대규모 프로젝트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도입도 안 된 EUV 개발자 뽑는 中
아울러 서울경제의 취재 결과 중국은 최근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으면서 소재·부품·장비와 관련해 우리 기술과 인력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반도체 미세 공정을 위한 소재나 장비를 다룰 수 있는 인력을 암암리에 국내에서 모집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반도체 업계의 채용 사이트에는 중국의 특정 업체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 ‘반도체 포토레지스트’ 연구개발 경력직 채용 공고가 올라와 있다. 포토레지스트는 빛으로 회로 모양을 반복적으로 찍어내는 노광 공정을 할 때 동그란 웨이퍼 위에 균일하게 도포해야 하는 액체로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소재다.
특히 이번 채용 공고에는 불화크립톤(KrF), 불화아르곤(ArF)용 포토레지스트는 물론 첨단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극자외선(EUV)용 반도체 포토레지스트 개발 경력자 모집도 명시돼 있다. 아직 중국에서 도입조차 되지 않은 EUV 공정용 포토레지스트 개발 인력을 뽑는 것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성능 넘어 공급망 관리 기술도 호시탐탐
업계의 정보를 종합해보면 최근 중국 내에서 포토레지스트 개발 인력을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있는 회사는 중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제조 업체인 ‘시네바(Sineva)’로 알려졌다. 이 회사는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 첨단 5㎚(나노미터, 10억 분의 1m) 반도체 생산 경력이 있는 한국과 소재 강국인 일본에서 근무하는 포토레지스트 전문가를 끌어들여 새로운 조직을 꾸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해당 채용 공고 역시 시네바에서 헤드헌터 업체를 통해 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시네바는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업체 BOE의 자회사다. 중국 BOE는 2000년대 초 국내 기업인 하이디스를 인수한 뒤 기술을 빼내 내재화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글로벌 1위 디스플레이 업체에 올랐다. 업계에서는 BOE의 자회사인 시네바가 디스플레이 장비 부문을 넘어 첨단산업의 뿌리인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세세한 영역까지 접근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소재 장비 업체가 포토레지스트 성능 개발을 넘어 한국처럼 체계적인 공급망 관리와 품질 관리 노하우를 습득하기 위해 국내 대기업 직원들과 전문가들을 호시탐탐 탐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홍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