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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m 떨어져 마주보고 선 두 석상 옥룡천 따라 미완의 러브스토리가

지역뉴스 | 라이프·푸드 | 2018-03-02 10:10:19

익산,옥룡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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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확실치 않은 유적의 비밀은 전설과 설화를 입고 다시 태어난다. 그마저 없으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깨진 조각을 이어 붙인다. 역사학자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익산 금마면은 미완의 왕국이 파편으로 남은 곳이다. 마한, 백제, 후백제, 보덕국 등 무려 4개 왕조가 이곳을 터전으로 새 세상을 열어보려 했다지만, 기록이나 유물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다. 모두 그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금마면 소재지 남측 들판에는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두 기의 석상이 동고도리와 서고도리 두 마을을 가르는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200m 떨어져 마주보고 서 있다. 길다란 사다리꼴 석상은 얼굴이나 손동작, 의복의 조각이 도드라지지 않아 불상이라기보다 마을을 지키는 선돌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그냥 ‘인석(人石)’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편 석상 뒤의 ‘군남 석불중건기(郡南 石佛重建記)’ 비석에는 철종 9년(1858)에 익산군수 황종석이 넘어져 방치돼 있던 것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비문에는 또 “금마는 익산구읍의 자리인데 동ㆍ서ㆍ북의 3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런데 유독 남쪽만이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 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의 수문(水門)의 허함을 막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적고 있다. 2기의 석상이 왜 떨어져 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인데, 동쪽의 여인석과 서쪽의 남인석이 섣달 그믐날 밤 얼어붙은 옥룡천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새벽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얼개만 남은 전설에 살을 덧붙이는 시도도 있었다. 익산시 홈페이지에 올랐던 원광대 박태건 교수의 고도리 석불상에 얽힌 러브스토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고려시대에 보석 세공장인 ‘보은’이 살았는데, 그가 만든 보석이나 장신구를 착용하면 병이 낫거나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를 전해들은 왕비가 궁궐의 모든 장신구를 보은에게 맡기는데, 일만 열심히 하는 바람에 혼기를 놓친 그를 위해 왕비는 석공의 딸 ‘석화’를 소개해 준다. 그런데 둘이 알콩달콩 사랑에 빠져 장신구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자 왕과 왕비는 둘 사이를 갈라놓고 옥룡천이 얼어붙는 섣달 그믐날에만 만날 수 있게 했다. 1년에 단 하루 옥룡천에서 만난 둘은 헤어지지 못하고 서로 끌어안고 결국 얼어 죽고 말았는데, 왕비는 이를 후회하고 석화의 아버지를 시켜 양쪽 마을에 석불을 만들어 기리도록 했단다. 익산판 ‘견우와 직녀’ 이야기인 셈인데 널리 주목받지는 못한 모양이다. 언젠가는 200m 떨어진 두 석상의 비밀을 풀어 줄 더 탄탄한 러브스토리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탑 하나로 꽉 찬 왕궁리유적

고도리 석상 바로 옆 1번 국도 지하차도를 통과하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왕궁리유적지다.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혹은 별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국립부여박물관이 1989년부터 발굴 조사한 결과는 백제유적으로 모아지고 있다. 백제 무왕 시대의 왕궁 외곽담장과 석축이 확인돼 왕궁으로 일정기간 사용되다 백제 말기나 통일신라 초기에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워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 245m, 남북 490m의 담장으로 둘러싼 왕궁 내부에는 왕이 정사를 펼친 정전을 비롯해 14개의 백제시대 건물 터도 발견됐다. 백제 최고의 정원과 화장실 유적, 금ㆍ동ㆍ유리 등을 생산하던 공방 터도 확인됐다. 이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015년에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왕궁리유적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홀로 선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전부다. 그것도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에 해체하고 수리해 복원한 것이다. 당시 탑을 받히고 있던 기단부와 1층 지붕돌 윗면에서 발견된 녹색 유리사리병과 금강경판은 국보 제123호로 지정돼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궁성도 전각도 없이 탑 하나만 덜렁 남아 유난히 쓸쓸할 것 같지만, 왕궁리유적은 전혀 허전하지 않고 의외로 꽉 찬 느낌이다.

입구의 오래된 벚나무가 터널을 만들었고, 오층석탑을 지나 언덕 꼭대기 후원 건물 터까지 오르는 능선이 한없이 부드럽다. 높지 않은 언덕에 서면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고만고만한 농촌 마을이 궁성을 호위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26일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지만, 왕궁리유적엔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머지않은 봄에 이 언덕에 스며드는 볕이 얼마나 따사로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삼국사기에 전하는 백제 궁궐의 미학이 탑 하나만 남은 유적에도 그윽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미륵사지가 말하지 않는 것들

왕궁리유적지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의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금마의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미륵사의 실체도 상당 부분은 남겨진 유물과 기록을 단서로 한 추정이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사 창건에 대해 신라의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600~641년 재위)이 된 마동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선화공주와 무왕이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해 이곳에 절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17세기 무렵 폐사(이것도 추정이다)된 이후 미륵사지에는 서탑(국보 제11호)과 당간지주 1쌍만 겉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탑의 이미지는 백제의 상징처럼 강렬하게 남았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사선을 그으며 허물어진 바로 그 석탑이다. 1974년과 1975년 발굴로 미륵사지 동쪽에도 서탑과 똑같은 석탑이 있었음이 밝혀졌고, 1980년부터 15년간 진행한 조사를 통해 미륵사의 전체적인 가람 배치도 드러났다. 동탑과 서탑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법당)의 성격을 지닌 건물이 하나씩 있었음이 확인됐다. 또 각 탑과 금당을 한 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3탑 3금당 3회랑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현재 미륵사지에 들어서면 당황스럽게도 백옥처럼 뽀얗고 반질반질한 현대적인 9층 석탑이 가장 눈길을 잡는다. 바로 허물어진 서탑과 대칭을 이루며 서 있던 자리에 복원한 동탑이다. 매끄럽게 깎은 탑 날개나 빈틈없이 맞물린 석재 등 겉모습은 나무랄 곳 없는데, 미적 감각이 전혀 없는 문외한의 눈에도 헛헛해 보이는 건 왜일까. 더 크고 화려한데 왕궁리 오층석탑보다 빈약해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에서 “돌이 죽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으로 쪼은 것과 기계로 깎은 것의 차이’ 못지 않게 ‘절대자를 모신다는 종교 하는 마음’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이 큰 탑을 복원하는데 1년(1991~1992년) 남짓 걸렸으니 문화재 복원이라기 보다는 조경 공사에 가까웠다. 유홍준의 말마따나 아침저녁으로 희끄무레하게 윤곽이 드러날 때나 봐줄 만한 탑이다.

다행히 2013년 시작한 서탑 복원공사는 지난해 말에야 마무리했다. 그것도 동탑처럼 전체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덧칠해 놓은 시멘트를 벗겨내고 원형이 남아 있던 6층까지만 보강 수리했다. 탑은 아직 복구공사를 위한 가건물 안에 갇혀 있다. 그럼에도 동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윽하고 멋스럽다. 가건물을 완전히 철거하는 데에 또 상당 기간이 소요돼 올해 10월에나 제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미륵사의 숨결은 석탑을 해체한 부재에도 담겨 있다. 1층에서 6층까지 석탑에서 나온 석재 중 다시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돌을 늘어 놓았는데 그 양이 엄청나다. 무심한 돌들이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모를 일이다. 미륵사의 전체 모습은 유물전시관의 모형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동향로와 사리장엄, 갖가지 장신구 등 석탑 해체과정에서 출토한 다양한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금강 따라 남은 초기 교회의 흔적

미륵사지에서 약 30km 떨어진 익산 망성면에는 ‘화산(華山)’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다. 산세가 너무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 언저리엔 화산보다 이름이 예쁜 ‘나바위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1897년 본당 설립 당시 ‘화산본당’이라 했지만, 산줄기 끝의 너른 바위에서 이름을 따 1989년부터 ‘나바위성당’으로 부른다.

나바위성당은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외형으로 주목받는다. 정면 계단을 오를 때는 여느 성당과 다를 바 없이 첨탑만 보이지만, 마당을 가로질러 옆에서 보면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1906년 흙벽에 기와를 얹은 순수 한옥 목조 건물로 지은 후, 1916년 개수하면서 흙벽을 벽돌로 바꾸고 종각을 증축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성당 앞면은 고딕양식의 3층 수직 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로 꾸몄고, 지붕 아래에는 ‘팔괘’를 상징하는 팔각 채광창을 냈다.

이곳은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서품을 받고 입국해 첫발을 디딘 곳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성지이기도 하다. 화산 정상으로 낸 ‘십자가의 길’을 오르면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비’와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망금정’이 나온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일대가 비닐하우스가 덮인 평야로 바뀌었지만, 김 신부 일행이 입국한 1845년만 하더라도 이곳까지 금강 물길이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나바위성당에서 멀지 않은 성당면의 두동교회도 초기 한국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23년 해리슨 선교사가 설립한 두동교회는 1929년 무렵 지금의 ‘ㄱ’ 자형 교회를 지었다. 김제 금산교회와 함께 단 2곳 남은 이러한 구조는 개신교 전파와 남녀 구분이 엄격했던 한국적 전통이 타협한 결과물이다. ‘ㄱ’자 건물 양편 끝에 남녀의 출입문이 따로 있었고, 모서리에 세운 설교 강단을 중심으로 휘장을 쳐 남녀 신도가 서로 보지 못하도록 했다. 서까래가 드러난 내부는 지금도 단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단 초기의 양철지붕은 2003년 보존을 위해 아연 골함석으로 교체했다. 교회를 지을 당시 심었다는 소나무와 종루가 어우러진 풍경이 시골 교회의 운치를 더하는데, 바로 옆에 현대식으로 지은 무인카페가 다소 분위기를 헤친다. 

 

익산 왕궁리유적지에는 오층석탑만 남아 있지만 쓸쓸하기보다 아늑함이 느껴진다. 한겨울에도 봄 햇살의 따사로움을 감지할 수 있다. 익산=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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