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어머니 열성으로 일찍이 한글을 깨우친 덕에 유치원생때부터 그림일기 형식으로 하루에 한 문장이면 족했던 일기를 써오다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일기가 숙제라는 무게감으로 다가 왔었지만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수집하듯 일기를 간직해 왔었다. 유년의 습관이 아이들 육아일기로 이어졌고 할머니 호칭을 얻기 시작하면서도 계속 이어져 왔지만 이방인의 길로 들어서면서 어머니께 맡겨 두고 떠나왔던 일기모음은 어머니께서 소천하시면서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지만 40여 년을 이어온 이민자 일기는 오밀조밀 훈훈한 훈기를 지속적으로 간직 해오고 있다. 유년의 그림일기부터 한국에 두고 온 일기들이 많이 아쉽다, 내 딸들과 손주들에게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문득 문득 마음을 뒤척이게 하기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생의 여정을 살아있는 기록으로 이어왔음에 무량으로 흐뭇하다. 날로 쇠퇴해가는 기억력을 마치 열쇠만 있으면 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이는 것은 어줍고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일기 덕후 때문일 것이다.
일기를 쓰고 아득한 옛일이 가물가물할 때 일기를 뒤척이다 보면 반갑기도 하고 그날의 일과들이 영상처럼 떠오른다. 조금은 더 젊었던 그 날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기회이자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되는 행운을 만끽하게 되기도 한다. 기록의 힘은 무섭다. 일기는 과거를 반추하는 열쇠요, 가장 나 답게 하루치의 마음을 진솔하게 남기는 일이다. 나를 간결하게 만나는 길이요 나를 향한 집념을 해소하는 길이라서 가장 나 다운 나를 지켜내며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감각, 개념의 잠재의식을 돌아보게 되고 덤으로 글 쓰는 일에도 적잖은 소재와 감성을 이끌어내는 도구로 쓰임받고 있다. 대가족 생일과 각종 기념일 등, 하루 일과와 예약기록, 약속들을 간단한 메모 형식으로 기록하는 수첩과 일기의 사명을 적나라 하게 써내려 가는 일기는 따로 있다. 때로는 육하원칙에 준한 기록에 집중한 적도 있었고 감정이 격해지거나 심란한 일을 만난 날에는 북받친 감정을 담아내느라 여러 페이지를 소모하기도 한다. 누군가와 훈훈한 대화를 나눈 날은 대화의 흐름을 가능한 한 역력하고 선연하게 기록해온 나머지 부산물로 단편소설 구상의 지지대가 되어주고 있다. 디지털 방식보다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해 왔기에 나만의 필치로 지속적으로 이어가려 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루치 마음을 기록해 두면서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건너뛰기도 가끔은 허용하지만 이 또한 손가락 꼽을 만큼에 그친다. 오랜 습관일 수도 있겠지만 하루치 마음의 흐름을 보존하고 싶음이요 소소한 흐름의 일과일지라도 마냥 흘러 보내고 싶지 않은 삶의 애착이요 내 삶을 사랑해 주려는 고착으로 보인다. 오늘이 어제 같고, 오늘이 내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이지만 마냥 흐르고 또 흘러가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에 생각없이 머물고 싶지 않음이라 하루하루들에게 색깔과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하루라도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책임없이 마구 보낼 수 없다는, 함부로 허투루 보내서는 안된다는 단호함이 어쩌면 아이 같은 마음의 발로가 저지른 것 일수도. 단 하루도 오늘과 어제가 같은 날은 없었으니까. 하루들에게 충직한, 빈틈 없는, 허술하거나 부족한 점까지 놓치지 않으며 삼엄하고 세밀하게 꼼꼼하게 나를 살피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시도로 이어오고 있다. 어쩌면 자신에게 강요나 혹사는 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질문을 받을 것 같기도 하다. 지금껏 감사하고 다행한 하루들이었고, 기쁜 소식 없이 지나가기도 하고, 마음 아프거나 궂은 소식 없이 수 많은 하루들이 지나갔다.
언제나 변함없이 감사가 이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기를 써내려 간다. 먼 훗날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일념으로 하루치 마음을 잠잠하게 말 없이, 깊은 밤의 고즈넉함에 젖어 묵연의 묵적으로 기록에 잠기곤 한다. 쓰는 모드에 집중하는 동안은 하루치의 시간을 살아내는 현장에 있는 것처럼 적게 된다. 하루를 지나쳐 버리면 그 날, 그 때의 감성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어렵고 그 풍경들도 더듬거리게 되기에 가능하면 하루를 넘기지 않으려 한다. 인생길을 하루하루 걸어가고 사람을 만나고, 숱한 말이 오고 가도 가슴에 남는 건 미미한 그저 흘러 보내도 좋을 이야기들 뿐, 이야기 속에서 화려한 과거는 있어도 들추어 보면 남길만한 두드러진 보람의 흔적은 찾아내기가 쉽지 않음이라 잃어버린 시간들만 앙상하게 드러날 뿐이라서 생각만이라도 아름다운 것에 머물자고, 늦은 밤 펜을 힘주어 붙들게 된다.
쫓기듯 서두르며 살아온 사람, 쉬엄쉬엄 살아온 사람들 누구에게나 길은 다 열려있기 마련인데 진정 자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시간은 지나가면 또 오는 것으로 믿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우왕좌왕이 보인다. 더러는 길에서 희망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도 있음이요, 자신보다 남을 존중할 줄 알지만,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함께 걷기도 한다. 시간을 아낄 줄 알아서 일찌감치 출발하는 사람, 마음에 가득한 여유로 하여 천천히 출발하는 사람들이 앞다투며 길을 떠나지만 당도하는 시간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 길이다. 나서는 길이 어둑어둑했지만 금새 환하게 밝아 오기도 하고 구비구비 휘어진 길도 가다보면 곧은 길로 들어서게도 된다. 이러저러한 사연을 안고 길을 가는 사람들과 어우러졌던 흔적들이며, 그 자국들을 매일매일 써내려 가는 내 뒷모습은 어떤 그림자를 남기며 매듭지을까. 일기 속의 하루치 마음들은 무지개처럼 곱기만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