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성경적 가정을 세우기 위해 이와 같이 기초를 닦고 기둥을 세운 다음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창문을 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이 없는 집을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집은 창문이 있어야 빛이 머무는 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집에 빛을 유도하는 두 개의 창문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해와 용서”입니다. 크리스찬들은 크리스찬이기 때문에 절대로 잘못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막상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완벽주의 영향 탓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아직은 완성될 수 없는 존재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완성을 향해서 가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는 아직도 실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크스스찬답게 산다는 것은 절대로 잘못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정직하게 수용하고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라고 용서를 빌 수 있는 관계가 성경적이고 건강한 부부관계입니다. 이러한 용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이해입니다. 본래 이해란 단어는 영어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understanding) 즉, “무엇 아래 산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는 더 재미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이해란 단어를 “상대방의 자리에 선다”는 뜻의 어원을 가진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자리에 서는 것, 아내가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부모가 자식의 입장에서 서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이해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 부모들이 자녀들을 정상적으로 기르기 위해서는 놀이에 대한 개념이 좀 바뀌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자식들을 기르면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놀지 마…” 그런데 놀이는 매우 중요하고도 교육적인 학습 방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놀이할 때 그 놀이를 하면서 인생을 배웁니다. 은행 놀이를 하면서 그들은 사업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하게 사업을 하지요. 그런데 그 와중에 어머니가 와서 “야 놀지 마”라고 말하며 사업을 뒤집어 엎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부터 아이의 마음속에는 “엄마 날 이해 못해” 라는 생각이 싹 트지 않겠습니까? 전쟁 놀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전쟁 놀이를 할 때 목숨을 걸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그들의 사활을 걸고 놀이에 임합니다. 그럴 때 부모랍시고 하는 소리가 “야. 그만 좀 놀아라. 지금 놀 때야”라며 야단을 치면 아이는 그때부터 아빠 엄만 날 이해 못해라는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만약 이이가 전쟁 놀이를 하며 흥분해 있을 때 엄마가 곁에서 함께 흥분하며 “누가 죽었니” 네가 위험해. 큰일 났구나. 어쩌면 좋아…라고 거든다면 아이들과 부모의 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얼마나 가정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모릅니다.
가정을 세우는 과정에서 창문을 달았으면 이번엔 지붕을 덮어야 합니다. 지붕이란 “경건생활”입니다. 우리는 지붕이 없는 집을 연상할 수 없습니다. 비바람, 폭풍우, 눈보라 속에서 우리의 가정을 지켜주는 지붕은 우리의 경건생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건 생활이 없는 가정은 지붕이 없는 집과도 같습니다. 가정에서 드리는 가정 예배나 부부가 엎드려 드리는 기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 이런 경건한 생활이어야 말로 가정을 굳건하게 지키는 지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