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진정한 종교는 상대자의 절대화와 구별되어진 올바른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의 소망을 담는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그릇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혀로 맛을 느끼는 것, 피부에 닿이는 것을 통하여 오는 가장 본능적인 인간욕구에서 빚어지는 <평범한 욕심>과는 그 차원을 달리 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가져다주는 명예와도 그 차원을 달리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실 때 사탄 마귀로부터 받은 세 가지 시험 중 두 번째 받으신 시험, “마귀가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하여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마 4:5~6).
인간의 자아 실현으로 인한 욕망 즉 <명예욕(Lust for Honor)>에 대한 유혹의 시험이었습니다. 메시아로서의 흔들림 없으신 예수님의 일관성은 이 시험을 통과하시는 순간, 예수님의 진실하신 거룩함은 더욱 더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사탄 마귀가 <종교적 명예와 존경에 대한 욕망의 덫>을 통하여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시발점에 제동을 걸어서 메시아로서 구원사역의 앞날에 먹구름을 만들고자 함이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명예의 덫(The Trap of Honor)>을 말씀의 능력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신 6:16, 마 4:7). 예수님은 시대적 오류의 대명사인 서기관과 바리새인과는 구별되어진 의(Righteousness)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탄 마귀가 만든 <명예의 덫(The Trap of Honor)>에 빠져 두 번째 시험 앞에 무너지셨더라면, 예수님의 의는 종교의 결정적인 욕망의 대명사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추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사탄 마귀가 만들어 놓은 <명예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는 구별되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종교적 명예와 존경에 대한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근본적인 실존은 언제나 행동의 근원인 마음이 아니라, 보여지는 행동에 전적으로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예의 덫>에서 당당하게 승리하신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5-7).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댓가성의 욕망에 빠져서 종교적 삶을 산다고 자부하면서도 감투와 공적 보상에 대한 욕망이 그 도를 넘어설 정도입니다. 자동차 뒷면에 붙이고 다니는 학벌과 소속단체에 대한 과시와 선전, 일상사가 되다시피한 자격증과 경력 부풀리기, 어느새 만연하고 있는 “자존감” 문화의 한 부분으로 당연시되는 <일그러진 군상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우리의 실존과 무관하게 그저 삶의 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추한 모습입니다. <명예의 덫>을 경고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 23:8-11).
<명예의 덫>을 종교라는 길을 걷는 자, 혹은 그 무리들이 경계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첫 번째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결정적인 범죄행위를 또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명예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책은 <오직 한 분의 청중, 예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