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를 향한 미국의 행보를 보면 솔직히 부럽다. 천문학적 돈을 퍼부을 수 있는 달러의 힘도, 목표를 정하면 밀어붙이는 추진력도, 그리고 국익에 맞춰 단합된 모습을 보이는 미국의 정치마저도….
미국은 동아시아에 산재해 있던 반도체 자산을 블랙홀처럼 흡수하고 있다. 527억 달러의 보조금을 뿌려 2022년 반도체지원법 제정 이후 4년간 끌어들인 투자액이 3,517억 달러에 달한다. 반도체의 설계는 물론 생산 라인까지 품었다. 구글·엔비디아 등 빅테크가 설계하고 미국 내 인텔·삼성전자·TSMC 등이 만들면 메타·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사용하는 반도체 생태계가 미국에 다시 완성되는 것이다.
기업의 마음을 사는 데도 공을 들이고 있다. 2022년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향해 “땡큐, 토니(최 회장의 영어이름)”라고 소리쳤다. SK가 22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에는 “역사적 발표”라고 추켜세웠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에 400억 달러 이상의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한 지난 15일, 미국 정부와 주 정부 그리고 언론들은 과할 정도로 환호했다.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 공장으로 가는 길에는 ‘삼성 고속도로(Samsung Hwy)’ 표지판도 만들었다. 세계 최강의 미국도 전략적 산업을 위해 이렇게 절실해진다.
투자 유치와 일자리를 위해서지만 더 큰 목표는 다른 곳에 있다. 자국 기업, 인텔의 투자 현장을 찾은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가 첨단 반도체를 발명했지만 제조는 거의 아시아로 이전했다. 2030년 전까지 세계 최첨단 반도체의 20%를 생산하는 궤도에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40년 만에 첨단 반도체 제조가 미국으로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결기가 느껴질 정도인데, 칩 아메리카가 완성될 2030년 이후가 두려운 이유다. ‘캡틴’ 인텔을 축으로 미국의 칩 어벤저스가 완성되면 또 어떤 전술적 선택을 할지 몰라서다. 칼날의 방향은 다시 바뀔 수도 있다. 헤게모니를 쥔 국가만의 특권이다.
보조금만 봐도 그렇다.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생산원가를 추산할 온갖 자료를 내야 한다. 웨이퍼 크기별 생산능력, 가동률, 연도별 생산량과 판매 가격 변화는 물론 반도체 수율, 실리콘과 질소, 산소 등의 반도체 소재도 포함돼있다. 사업보고서에서도 공개하지 않는 항목들이다. 기밀이라는 얘기다. 지난해 기준이 공개됐을 때 반도체 기업들이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TSMC는 지원금 신청서를 낼지 입장 표명마저 유보하기도 했다. 그러자 미국은 “공짜 점심은 없다”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기 싸움의 결과는 뻔했다. 지금은 한 푼의 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경쟁한다. 발표 때마다 투자의 규모도 커지고 있다. “수퍼 파워 미국의 환대가 뜨겁고 조건도 파격적이다. 어느 기업이 그곳에 투자하고 싶지 않겠냐”는 기업의 속내다.
반도체를 향한 구애는 미국만이 아니다. 430억 유로 규모의 반도체법에 합의한 유럽연합(EU)은 반도체 산업에 81억 유로의 보조금을 지원한다. 2014년부터 3,429억 위안(64조 원)의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를 조성한 중국은 2,000억 위안(36조 원) 규모의 자금을 추가 조성할 계획이다. 일본 역시 반도체 등 지원을 위해 4조 엔(35조 원) 규모의 예산을 확보해뒀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는 평온하다.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은 물 건너갔다. 세수 부족 등이 표면적 이유지만 결국 대기업 특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조금은 차치하고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만기 연장, 클러스터 설립 규제 철폐, 추가적인 세제·금융 등도 먼 산이다. 기업의 국내 투자를 ‘유치’가 아닌 당연시한 결과다. 투자 유치를 위해 국내 기업을 향한 정부의 코리아IR 기대는 언감생심이다.
수십~수백조 원의 투자 계획을 낸 대기업이 늘 한국에 투자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기업들은 더 좋은 투자 조건과 시장이 있다면 어디든 간다. 이익을 내는 게 목적인만큼 기업이 갖는 생리다. 버스 떠난 뒤 손을 흔들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이철균 서울경제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