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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겨울 비망록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4-04-05 08:03:57

행복한 아침, 김정자(시인·수필가)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

 김정자(시인·수필가)  

 

노을이 비낄 무렵, 고층 아파트 정상에서 바라본 애틀랜타 평원 저 너머까지 다가올 계절의 기운이 넘실대고 있다. 노을 빛살에 장렬하게 물든 장관 앞에 숨이 차 오르던 세상사가 그늘로 사라져가는 듯 하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치 강렬한 정경이라 얼른 사진기에 담아 둔다. 시리도록 청명한 마지막 계절 겨울 풍경화가 감동적이다. 긴겨울 동안 아낌없이 내려놓음했던 나무들도 춥고 긴 겨울을 견디며 마지막 추위 쯤은 거뜬히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 희망서린 표정이 역력하다. 가을이 겨울로 환승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겨울바람에 갈대가 흩날리는 정경을 바라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울나기에서 새 봄맞이로 무던히 들어설 수 있도록 서둘고 있는 숲의 두런거림이 경쾌해 보인다. 이렇듯 그윽한 계절 길목이 몹시도 그리워 아련한 향수가 돋아나는 날도 바로 저만큼일 것 같은데 겨울은 숱한 추억의 주름을 만들어가며 겨울 비망록을 기록하려 한다.

추위로 종종거렸던 겨울 뒷자락이 등을 보이기 시작하는 계절 문턱에 섰다. 계절 출렁임에 민첩한 따름이 이어지질 못해 안타깝긴 하지만, 나이를 거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 조차도 덮어두고 계절 흐름에 순순히 따르지 못하는 감성이며 동작이 어쩜 욕심일 수도 있겠다 싶어 노구가 이끄는 대로 흘러 가려한다. 투명한  겨울 햇살을 머금은 숲의 향기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어우러져 마지막 계절 문턱이 무색해지도록 새로이 열리는 계절에게 다 내어주고 떠나기 위해 추억 캠퍼스 완성을 서두르고 있는 것 같아 계절과의 헤어짐과 영접에 마음이 아무튼 부산하니 다망해지는 느낌이다. 나이 만큼의 깊이 안에 물든 노을과 보내는 계절 겨울 과의 은밀한 조화로움이 어찌 이리 쓸쓸할까.

해넘이 노을처럼 하루 동안의 희망을 합일된 어레인지로 다양한 편집을 하듯 남은 날들의 유용한 도모를 위해 일상의 조명을 밝게 조율해가며 가끔은 이모티콘 같은 가벼운 날들로 건너가고 싶어진다. 떠나는 겨울 상징 중 하나로 이글거리는 한낮 햇살까지도 겨울 비망록에 담아두리라. 하루를 다한 일몰 석양과 마주하며 노구의 아낙에게 삶의 원형을 보존해주며 남은 날들을 좀 더 색다르거나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가게 해주고 싶다. 번잡한 세상살이 상념들, 불확실한 시간의 엉김 조차 이제는 조용히 밀어내야할 때이다. 노을과 어울리는 추억들을 저장하며 화사한 호들갑을 곁들인 분망도  조용히 걷어내려한다. 겨울 나무들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서려는 회귀본능에 충실하고 있는 중이다. 화려했던 봄날, 연록의 향연을 시작으로 푸르렀던 여름 시절을 보내고 형형색색 단풍을 덧입으며 종국에는 다 내려놓고 말끔하게 비운 모습에 잠겼다가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맨몸으로 삭풍을 이겨내면서 자연이 마련해준  본연의 모습으로 매무새를 다듬으며 고연한 진면목의 자태로 귀환하고 있다.

겨울을 떠나보내는 노년의 길목에 들어선 나이들어버린 아낙은 하늘을 우러르며 하늘 마음을 배우며 하늘빛으로 물들고 싶다. 홀가분하게 계절을 밀어내고 가볍게 들어서고 미련없이 떠나는 계절의 적당한 안일과 적절한 나태가 부럽다. 안으로는 여린 생명을 키워내고 나이테가 파문처럼 생명줄을 그려가는 동안 기꺼이 폭풍도 한설도 마다않으며 올곧음으로 하늘만을 바래며 뿌리와 몸과 가지를 지켜 낸 평안의 표정 또한 비망록에 담아 두기에 충분 하다. 본연의 모습에 잠기는 계절이 가장 아름답고 진솔해 보인다. 계절을 모방하고 인생 여정 밑그림으로 받아 들이려는 일치점까지 겨울 비망록에 남겨질 것이다.

다 비워내고 내려놓으며 최소한의 수분 만으로 혹한을 견디며 뿌리를 지켜낸 거룩하도록 무릅쓴 희생이 봄을 퍼올리는 힘의 근원이 되어 주었기에, 결국은 숲을 지켜내고 겨울을 지켜낸 것은 나목이었으매 겨울 기적을 일구어낸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해서 나이든 인생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해도 될 것 같다. 묵은 계절과 새 계절과 얼싸 손을 잡고 세월을 넘기고 있다. 돌이켜 보라는 뜻이려니, 새 희망을 품어보라는 재촉이려니. 거리마다 신명나는 봄꽃들이 꽃잎을 열고 겨울 기적이 봄을 열어가고 있다. 묵은 것은 거름이 되고 새싹이 솟아 오르고, 새 움을 틔워내고 연록의 고귀한 생명이 열리고 있다. 날마다 분초마다 쉼 없이 겨울 기적이 만개하고 있다. 하여 겨울 비망록은 풍성해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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