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3월로 들어서면서 비오는 날들이 계속되는 것을 봄이 들어서는 숨결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물어서 비를 기다리는 동네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하면서도 하늘엔 계속 먹구름이 감돌거나 비가 오고 또 오고, 오늘은 햇살을 만나게 되려나 근심스레 창밖을 자꾸만 보게 된다. 캘리포니아 북쪽 요세미티와 레이크 타호 쪽으로 12피트 넘는 눈이 내려 눈보라로 하이웨이를 닫을 정도로 폭설이 이어지고 있고, 텍사스 산불 발생으로 그 피해는 역대 최대 규모이며 이 또한 기후변화에서 기인된 천재지변이다. 애틀랜타 일대에 내리는 비가 텍사스 화재 현장으로 비를 몰아가기를 소원드리면서 미 전역 기후가 부디 안정되길 바램해본다. 밤 기운이 많이 떨어졌는데도 홍매화 꽃잎이 활짝 열린 걸 보면서 날씨에 동요되는 노년의 아낙 모습이 어찌 어색하고 낯선 모습이라 생경스럽다. 땅의 물기가 조금이라도 마르면 혹여 가뭄이 들어서기라도 하려나, 비가 며칠째 오락가락 하는 동안에도 창문을 자주 내다보며 안절부절이 된다. 기온이 떨어지면 추위로 손 마디가 아프고, 한낮 기온이 더워진다싶으면 반소매 반바지까지 챙기려 드는 극성이 진부하다. 평온하게 나이들고 싶은데 한 치 마음 속이 늘 가벼이 요동을 친다.
비가 자주 내리는 며칠 동안 햇살을 덜 받아서인지 아무래도 기운이 쉬 느슨해지는 것 같아 구름이 비를 받쳐주고 있는 사이에 마을 공원을 찾아 나섰다. 그 사이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나목 가지마다 연록의 새순이 온통 빈 가지들을 휘감듯 연한 운무처럼 곱게 덧입혀져 있었다. 빈 가지들의 매무새로 하여 온 산야가 생동감으로 가슴을 뛰게 만든다. 아무래도 농부 체질을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다. 공원 잡초라도 뽑고 싶어진다. 흙을 만질 때가 기운이 났었으니까. 어릴 적부터 흙을 가지고 노는 것을 참 좋아했었다. 넓고 깊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유년과 여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 즈음에 마당 한 귀퉁이에 주먹이 들어갈 만큼의 흙을 파내고 그 속에 색색의 풀잎과 꽃잎을 모아 조화롭게 담아 두고 그 위에 알맞은 유리 조각을 얹어서 그 사방을 꼭꼭 다져가며 예쁜 테라리움을 정원 여기 저기에 손수 만들어 두기도 했었다. 먼 이국 땅으로 건너오면서 흙 냄새와는 거리가 먼 생의 트랙에서 열심히 달리기만 해오다 시니어 아파트로 오기 전까지 흙장난을 마음 껏 하지 못해 재미가 없었던 터라 조그만 텃밭을 일구고 채소들이 잘 자라도록 흙을 돋우고 골을 내며 흙냄새를 즐겼던 시간들이 까무룩 떠오른다. 아무쪼록 나무들도 풀들도 이번 비를 잘 간직해서 잘 자랐으면 하는 바램을 가만히 전해본다. 무언가 소중히 간직한다는 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와 동질감을 일구어낼 것이라는 생각에 정한 데 없는 날씨 속에서도 생의 신호등을 놓치지 않으며 살아내야 할 것이기에.
봄을 재촉하는 대지에만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도 비가 내리곤 한다. 계절 경계도 없음이요, 넉넉한 자도, 부족한 자도 비에 젖지 않는 인생은 없다. 우산을 받쳐들고 비를 맞기도 하고 우산 없이 비에 젖기도 하지만 인생들의 마음에도 비가 내린다. 홍수가 지기도 하고 마음의 가뭄을 적셔줄 만큼 곱게 내리는 비도 있기 마련이라 비가 내린다 해서 모두 슬퍼할 일만 나열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비를 맞으면서 달콤한 낭만에 젖어 들기도 하고 어린 아이들처럼 빗 속을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함박 웃음을 짓기도 하듯이 생에 내리는 비는 각기 다른 여건과 주어진 현실을 바탕으로 세심하게 무리없이 소화해내려 한다. 그러노라면 함께 동행하거나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가뭄에 시달리는지 홍수 속에서 힘들어 하는지 돌아 볼 수 있는 인생이라면 더욱 아름다울 것 같다. 때론 너무 세찬 빗줄기 소리 탓에 아무도 내 가슴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지 못해서 인지 홀로 비에 젖으며 서 있었던 적도 있었다. 아무리 세찬 비바람이 불어와도 함께 우산을 잡고 걸어간다면 빗 속을 뚫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도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다 보면 아무리 거센 폭풍우가 닥치더라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요 거뜬하게 마주할 수 있는 굳센 기백이 쌓여갈 것이라서 빗 속에서 당황하며 초조해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생의 화창했던 날보다 비바람과 마주하며 어려움과 고초를 겪어내며 풍파를 견디어낸 날들이 인생 여로 중에 잊을 수 없는 소중하고 빛난 시간들로 남아있다. 인생길을 가노라면 마음 속에 큰 비가 내릴 때도 있거니와 그 비 끝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뜨는 날도 있더라는 것이다. 해서 삶의 풍경들로 하여 아름다운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무겁게 가라앉은 날씨가 계속되더니 저녁나절이 되자 아니나 다를까 비가 들어선다. 겨울 끄트머리에 내리는 비로 하여 매력적인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연록의 새싹이 ‘비는 축복’이라고 온 대지에 선포하고 있다. 비는 오고 또 오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