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점점 거칠어지고 험악해져 감을 느낀다. 얼마 전 한국 제1야당의 당대표가 흉기 피습으로 생명을 잃을 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정치적 증오에서 나온 테러로 추정된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더 안타까운 일은 테러 직후, 테러에 대한 객관적 진실 파악이나 정치적 테러나 증오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없고, 테러 피해자에 대한 근거없는 루머와 차마 옮기기 어려운 증오의 언어들이 소셜미디어에 넘쳤다는 점이다. 살벌하고 야박한 증오사회의 민낯이다.
증오의 언어, 증오범죄, 그리고 증오정치가 공공연한 증오사회의 모습이 한국 사회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언어폭력 서비스차별 물리적 폭력 등등 다양한 형태의 증오범죄로 한인들을 포함하여 소수민족이나 성소수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이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증오는 상대방에게 무시, 거절, 조롱, 차별, 학대, 불이익, 억압, 폭력, 모멸 등을 받거나 배신을 당할 때 나오는 감정이다. 증오심이란 미움의 감정을 넘어 사무치도록 몹시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말한다. 증오는 또한 상대방에 대한 편견이나 정치적 종교적 민족적 신념의 다름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증오의 감정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증오는 어떤 대상에 대한 미움이나 분노 때문에 그 대상을 해치고 싶을 정도의 공격적 감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은 증오심은 자신은 물론 이웃과 사회를 해치는 증오의 언어와 증오범죄를 가져온다.
199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그의 시 ‘증오’에서 증오의 감정이 개인과 사회에서 얼마나 재빠르고 끈질기게 종교나 조국 혹은 다른 그럴듯한 이름으로 죽고 죽이는 비이성적이고 광기에 싸인 집단적 증오의 역사를 만들어내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영리하고, 재치 있으며, 부지런하기까지 하구나. 증오가 얼마나 많은 노래를 작곡했는지 꼭 말로 해야만 하나? 두꺼운 역사책 속에서 얼마나 많은 페이지를 차지했는가? 얼마나 무수한 광장과 스타디움에 인간의 시체로 카펫을 깔았는가?…”
증오는 인간 개인의 근원적 감정인 동시에 집단적 증오의 형태로 광기와 비이성의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위험한 사회적 감정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의 사회에서 증오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기도와 명상, 증오의 원인에 대한 내면의 성찰, 이해, 용서의 노력, 공감훈련 등을 통하여 꾸준하게 증오를 내려놓는 노력을 해야 한다. 옛사람의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주라’는 말도 지혜로운 삶의 자세이다. 증오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증오를 자기 성장과 인격성숙의 계기로 바꾸어내는 가치있는 일이다. 증오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사랑의 길이 열리게 된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안나 카레리나는 증오가 우리의 내면에서 사랑의 길을 막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일부 정치집단이나 극단적 유튜버들 그리고 몇몇 보수 언론들은 교묘하게 증오의 사회적 확장을 부추기고 있다. 개인의 분노와 증오심을 이용하여 대중을 선동한 이 시대의 괴벨스같이 간악한 사람들이다. 사회가 함께 망하는 길이다. 멈추어야 한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아가듯이 정치는 너와 내가, 여와 야가, 보수와 중도와 진보가, 모든 국민이 ‘함께’ 하는 것이다. 나만, 우리 당만, 우리 민족만, 우리 종교만 옳고 진리라는 극단적 자기 확신을 내려놓자. 상대방을 살기좋은 세상을 ‘함께’ 열어가는 파트너로 인정하고, 서로에게 듣고 배우자. 정치는 ‘함께’ 하는 것이다.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진리의 길 역시 그러하다.
서로 ‘함께’임을 인정할 때 증오가 사라진다. 모두 ‘함께’가 되는 자리가 정치의 목적이요, 종교의 이상이다. 증오를 없애는 길, 모두 ‘함께’가 되는 길이 사랑이다. 증오를 없애는 가장 좋은 길은 ‘사랑으로 증오를 끌어안는 일’에 있을지 싶다.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