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수채화 물감을 있는 대로 다 풀어놓은 듯 색의 절정이 응축된 11월이다. 자태를 뽐내던 단풍도 낙엽 되어 빈 가지를 남기는 계절 앞에 너도 나도 시인이 되어지고 시류도 낭만으로 흘러 든다. 한 해 가운데 가장 익을 대로 익은 달 11월은 부여받은 숭고한 소명을 무사히 마무리한 색체가 가장 진한 달이다. 생명의 비롯인 농사를 매듭지으며 갈무리하는 일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어 들이며, 한 해 동안의 노력을 돌아보는 때이다. 봄이면 씨를 뿌리고 여름날의 뜨거움과 가뭄과 홍수를 겪어내면서 풍요로운 결실로 보람을 거두기까지의 수고와 노력을 수확의 기쁨으로 누리게 되는 계절이다. 가을의 명사적 뜻과 용법으로는 농작물을 거두어들임을 일컫는다. 가을걷이, 수확, 추수를 말하는 것으로 ‘가을하다’로 표현되기도 한다. 추수로 가을하는 계절로 ‘가을 스럽다’는 표현 또한 해넘이가 빨리 시작되고 일기 또한 신선해지면서 단풍이 가랑잎으로 서서히 내려앉음을 표현하게도 한다. 사색에 잠기기에 적절한 겨를을 11월이 베풀어 준다. 수확을 끝낸 빈 들녘을 바라 볼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을 제공해준 11월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들판은 가을걷이로 비워지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빈 들이 될 터이요 겨울 맞이를 위해 수습하고 준비하는 길목으로 들어설 것이다. 텅 빈 들판 앞에 서면 일견으론 쓸쓸해 보이기도 하지만 빈들도 쉼의 필요성이 절실해 보인다. 빈 들이 그려내는 비움의 미학과 쉼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선이나 색상으로 묘사하느라 열중해 있다. 한 해 동안 풍성한 결실을 위해 들판은 농부에게 모든 걸 다 내어주었고 겨우 내내 긴 호흡의 쉼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11월로 접어들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로 받아들이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급하고 분주했던 속도감을 제어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앞만 보고 달려오진 않았는지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는 적기가 아닐까 싶다.
새해 벽두에 계획했던 일들을 얼마나 이루어 놓았는지 여전히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 두 순을 움켜쥐려고만 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11월이면 하나 둘 내려놓고 마음을 가지런하게 모으며 무겁고 힘들고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안식에 잠길 수 있게 마음에 쉼을 베풀 때이다.
11월은 들판에서의 수고와 성취를 통해 수확의 풍요를 누리게 해준 들판을 비워주며 결실을 향한 감사를 드리는 절기이다. 먼 하늘 가로 기러기가 날아가는 11월. 한 해를 품어왔고 보냄을 준비해야 하는 만상이 교차되는 시기라서 생각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숭고한 목적을 무고하고 공평하게 거두어들인 안도의 색체로 가득한 달이다. 생명의 근본이요, 뿌리인 농사 일의 모든 과정들이며 여묾의 과정을 통해 무르익을 대로 익어버린
약간의 방심을 허락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평안이 깃드는 시점이다. 더 이상 푸르를 수 없는 높은 하늘이며 아낌 없이 만상 위에 쏟아지는 햇살이며 무결점의 흠 없는 축복과 감사의 절기 11월이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이라 했듯이 깊이 스며든 사무친 기다림과 그리움이 더욱이 아름다운 계절 11월과 평화로운 동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두드러진 탁월한 명상과 사유의 시선으로 말쑥하고 품위있는 고상한 지성으로 11월이 내어주는 생의 가교를 경유하며 남은 날들을 지나가고 싶다. 주어진 것으로, 허락 되어진 것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 인생이 인생 다울 수 있다. 거둠을 감사하고 주어진 누림을 감사하는 축복의 시간이 허락된 11월과의 동행이라서 더욱이 소중하고 귀하고 감사하다.
나뭇잎이 모두 낙화하고 마지막 잎새까지 흙으로 돌아가고 새 봄을 앞장서서 파릇한 연두 빛 새순이 새롭 듯 피어나는 순환을 생각하라 한다. 자연의 순환 따라 살아가는 생애의 색조 마저도 갈색으로 익어가고 있는 느낌이 된다. 계절을 향한 느낌이며, 세월을 바라보는 시선이 넉넉해지고 사유가 깊어지는 11월에게 꾸벅 고마움을 전하게 된다.
11월이 깊어갈수록 산다는 것에 정답이 미묘해진다. 삶을 영위해 가기 위해 의학이 필요하고 법률도, 경제도,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 같은 것들도 필요하지만 시와 낭만, 사랑도 삶의 목적이라고 많은 시인들은 노래했고 또 그 노래는 이어져갈 것이다.
인류는 주어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시를 쓰면서, 소설을 쓰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하루들을 보내고 일주일을 한달을 보내며 삶을 지속해 왔다. 들판을 비워내며 풍요로운 수확을 끝낸 감사로 채워가며 빈 들녘의 비움이 주는 안식을 새삼 깨달음 하는 아름다운 동행을 통과하고 있다.
11월의 솔직함과 비움과 겸허를 놓치지 말자고 가녀린 11월의 햇살 앞에서 다짐하게 된다. 이제 더는 남길 것도, 두고 갈 것도, 가져갈 것도 없는 가벼운 충만 만이 존재할 뿐이다. 살아오면서 섭렵해왔던 헛되고 헛됨을 다시금 익히며, 감사와 비움으로 내려놓음을 몸소 수행하고 있는 11월의 나무를 올려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