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선택된 무리임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증표는 세상의 번영이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이 과연 하나님이 동행해 주심을 누리고 있는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유일한 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그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올라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약속한 바를 다 이루어 주겠다. 가나안도 갖고 원주민도 쫓아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실컷 먹고 잘 살아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희와의 관계는 끝이다. 자. 올라가거라”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인 긴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결정적인 화해의 선언은 없었습니다. 결심을 굳히신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냉담한 선언 앞에서 그들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과연 이처럼 진노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까? 아니면 이것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심판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가나안으로 올라가야 하는가?”
이 두 갈림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왕 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모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막을 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거하는 저 바깥 한적한 곳에 텐트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쳐서 말하기를 “회막”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회막을 설치한 것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제의하였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저 회막으로 나아가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은 회막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곧 떠나 버릴 것 같은 영적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한 일은 이처럼 자기의 백성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삼백만 명에 가까운 엄청난 인구의 대집단이었습니다. 모세가 회막을 만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기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도가 시급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 평상시에 보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영적 각성은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기도로 이어지지 않는 영적 각성은 진정한 의미의 각성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중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은혜를 받을 만한 관계를 유지할 때 더 큰 추진력을 발휘합니다.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전심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백성들이 기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깨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유하는데 스스로를 헌신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백성들이 회막에서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은 모세를 통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모세와 대면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겠다는 표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회막이 위치하게 된 장소입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33:6-7)
모세는 이러한 위기 앞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진 밖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정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기서 일컫는 “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거 지역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매달린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영적 상태나 자신의 신앙의 태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일상적인 일들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응답의 음성을 듣기 위한 부르짖음의 시간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