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복을 입었던 세대다. 매주 토요일 수업(그 땐 토요일에도 수업이 있었다.)을 마치고 집에 오면 맨 먼저 하는 일이 실내화와 교복을 빨고 교복에 달린 흰색 칼라를 빨아 풀을 먹이는 것이 주말의 일 중에 하나였다.
다행히 고등학교는 다른 학교와 조금 시스템이 자유로운 학교를 다녀서 목 언저리에 다는 칼라 대신 블라우스를 입었고 일요일 오후엔 블라우스를 다려서 걸어놓고 월요일을 기다리곤 했다. 교회 갈 때도 교복을 입었으니 사복은 그리 많지 않아 교복 블라우스를 제외한 사복은 한 달에 한번 빨래를 하곤 했다.
우리 엄마의 지론은 “자기 옷은 자기가 알아서 빨고 다려서 입기”라 우리 자매들은 각자의 옷가지를 정리했었다. 한 달에 한번 청바지를 비롯한 사복 빨래도 우리 집에는 세탁기가 없어 한옥집 마당에 아예 빨래판과 빨래대야가 비치되어 있었고 동생과 함께 수다를 떨면서 빨래를 했던 기억이 난다. 손으로 빨래를 하자니 겨울엔 손이 시려서 고무장갑 안에 털장갑을 끼고 투덜대던 생각도 난다.
마당의 빨랫줄에 한달 치의 빨래를 널고 나면 중요한 일을 마친 후의 그 뿌듯한 자부심에 지금도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발전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오후 5시경엔 발전소의 공기를 빼는 시간이라 검은 미세한 검댕이가 날아다니며 빨래에 묻어 다시 빨아야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5시 전에 모든 빨래에 관한 일을 마쳐야했다. 여름엔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야겠기에 고생하여 널은 빨래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외출도 조심했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경에 아버지의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인 수동식 세탁기. 한쪽은 빨래를 돌리고 다른 한쪽은 탈수기능이 있었던 두 칸으로 만들어진 세탁기. 우선 내가 손으로 빨래를 비비지 않으니 힘들다는 생각이 없었고 게다가 탈수의 혁명은 가히 인간이 달을 다녀온 그 느낌에 비교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불 빨래를 하려면 온통 마당에 양동이부터 모두 모아 발로 밟고 짜고, 털고 그리고 함께 접었다.
오늘 퇴근 후 빨래를 돌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어릴 적 그 때를 생각하니 현대 문명의 축복이 실감난다. 부모세대에 “우리는 전쟁 후 어렵게 살았다. 너희는 고생을 몰라서 투정이다.”라는 잔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던 기억도 있다. 정말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 우리는 세기를 뛰어넘는 첨단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젠 배움의 목표가 공부보다는 인간성을 가르쳐야할 때이니 말이다.
<한연성/통합한국학교 VA 캠퍼스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