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영원한 안전지대(安全地帶)”를 노래한 시인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분명한 어조로 밝히고 있습니다. 시편 16편 1절과 12절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나이다.” 다윗에게 있어서 안전지대는 시간과 공간의 3차원적인 개념에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4차원의 세계 즉,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안전지대>란 말 그대로 어떠한 사물이 사람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는 <심리적인 상태>이며, 사람들은 낮은 수준의 걱정과 스트레스를 느끼며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를 지칭합니다. 위험수역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이름 그대로 <안전지대>를 말합니다. <바드윅>은 안전지대의 정의를 내리기를, ‘불안중립적인 위치에서 사람이 활동하는 행동상태’라고 합니다. 적어도 <안전지대(安全地帶)>로 불릴 수 있는 현실은 볼드윅의 말처럼 ‘우리의 불확실하고 부족하며 취약함이 최소화되는 곳, 즉 우리가 충분한 사랑, 음식, 재능, 시간, 존경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은 곳’을 말합니다.
현하(現下), 세계는 어느 곳이 안전지대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재해와 전쟁재해에 휩싸여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영원한 안전지대”는 개인에게, 가정에, 사회와 국가에, 전세계에 필수불가결한 하나님의 선물과 축복입니다. 무엇이 다윗에게 “영원한 안전지대”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윗의 고백대로 “말의 힘”입니다. 시편 16편 2절이 그 증거입니다. “내가 야훼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야훼 하나님의 지대를 벗어나서는 영원한 안전지대란 있을 수 없고, <나의 선함>과 <나의 강건함>이 결코 하나님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며, 나아가서는 <생사화복의 절대주권>이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강력한 신뢰>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안전(Security)”이라는 것은 일시적 차원도, 일차원적인 차원도 아닙니다. “안전”은 <영원한 차원>이요, <4차원적인 차원>으로만이 납득이 가고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의 신비(神秘)에 속합니다. 다윗은 비록 3000년 전의 사람이지만 그는 시대를 앞질러 간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사후에 있을 일들 중에 최고의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다윗의 가문>에서 탄생할 것을 미리 예언하였으며, 그가 이 신비의 확신에서 “영원한 안전지대”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만 급급하지 않고, 육신과 영혼을 초월하여 우리 인간을 보장할 수 있는 안전지대로서 “영원한 생명”까지 책임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영원한 안전지대”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9~11). 현하(現下)의 국제정세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습니다. 어느 곳 하나도 안전지대라 말하기에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완전히 보장하여 보호할 곳이 전혀 없습니다.
유한자인 인생은 항상 안전지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확신하건대,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현하(現下)의 시국에 간을 졸이며, 전쟁의 불안지대에 살고있는 가자지구에도, 아직도 지진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튀르키예와 모로코에도, 격감하고 있는 세계경제에 시달리고 있는 지구촌민 전체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안전지대”는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