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이민 와 살아남으려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고 치열하게 살았다. 다행히 자식들이 잘 커주었고, 경제적 안정도 어느 정도 이뤄냈다. 하고 싶은 일과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마음 속 버킷리스트에만 고이 간직한채 한해만 더 열심히 살자 마음 먹다 보니 어느덧 나이가 60대를 지나 70을 훌쩍 넘겼다. 숨가쁘게 살아 온 인생에 잠시 쉼표를 찍고 싶은 순간이 나라고 왜 없었겠는가.
어느날 아침 습관처럼 한국일보를 펼쳤을 때 눈이 번쩍 뜨였다. “죽기 전에 꼭 한번 가 봐야 할 길,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길, 마음 속에 버킷 리스트로 간직해왔으나 선뜻 나서기 힘들었던 길… 한국일보 미주본사가 고고한 유럽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 나서는 ‘2024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으로 미주 한인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2024년 창간 55돌을 맞는 본보가 창간 기념사업으로 기획한 산티아고 순례길 프로젝트에 일찌감치 신청을 마친 한 70대 남성 독자의 전언이다.
미주 한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은 프랑스길의 시작점인 생 장 피드 포르를 출발해 최종 목적지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장장 500마일의 대여정이다. 15박16일간 아름다운 황톳길을 순례자의 마음가짐으로 걸으면서 땀과 눈물로 점철된 지나온 이민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성찰하며,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을 기회를 독자들에게 선사하자는 목적으로 기획한 행사다.
2024년 본보 창간 55주년 기획으로 실시하는 이 프로그램은 1차(4월 3일~18일)와 2차(4월23일~5월8일)에 걸쳐 진행된다. 본보 프로그램은 특히 스페인 북부 지방의 관광명소인 빌바오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관람하는 것을 비롯해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했던 팜플로냐 시내 관광, 부르고스 대성당 관람, 순례의 끝이자 지구의 끝으로 불리는 묵시아와 피스테라 등을 방문하는 특별 일정이다. 또 순례자들을 위한 저렴한 숙소인 알베르게 대신에 4성급 이상의 그 지역 최고급 호텔에서 숙박하며, 각 도시 최고급 식당에서 식사하는 VIP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이번에 순례 여행 신청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60~70대 부부동반이 가장 많다고 한다. 지금도 활발한 의료 활동을 펼치고 있는 원로 정신과 전문의 조만철(78) 박사는 가장 먼저 산티아고 순례 신청을 했다. 그는 “수많은 한인들에게 정신 상담과 치료를 해왔지만 정작 내 자신에 대한 성찰과 힐링은 부족했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는 동안 그동안 지은 죄를 참회하기 위해 목록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60대 후반의 미셸 장씨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걷는 여유 속에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담고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고 참가 이유를 밝혔다. 또 다른 신청자는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오롯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고, 딸과 함께 신청한 한 참가자는 “순례길은 홀로이면서 같이 걷고, 같이 걸으면서 홀로 걷는 길이다. 딸 아이와 마음의 대화를 실컷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
신청자들의 상당수가 60~70대 시니어라는 점을 고려해 일부 구간은 걷고, 일부는 버스로 움직이면서 순례길의 다양한 정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일정을 준비 중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걷기 힘든 참가자는 전 일정을 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
누구나 한번쯤 잠시 숨을 고르고 지난 삶과 인생을 뒤돌아보게 된다. 때로는 외롭고 고독했으며 때론 기쁨과 슬픔이, 웃음과 눈물이 교차했던 격동의 이민생활이었을 것이다. 감추거나 잊고 싶었던 기억, 차라리 맺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인간관계로 인해 마음 아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디 모든 참가자들이 산티아고에서 내 인생에 쉼표를 찍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성스럽고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기를 응원한다.
<노세희 LA미주본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