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은퇴한 지인들 가운데 더러는 더 많이 여행을 하며 새로운 세상을 더 많이 만나야 하고, 보아야 한다고 아우성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항상 활동적이고 진취적이긴 하나 젊은 날에 이루지 못한 보상심리를 부추기며 황혼녘인데도 더 이상 늦장 부릴 수 없다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다. 마치 수험생들이 시험을 앞두고 미루어왔던 공부에 몰입하는 것처럼. 언뜻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애틋함이 실루엣으로 엿보인다. 이루지 못한 것들을 죄다 달성했노라 뽐낸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삼가 옷깃을 여미고 남은 날들을 사랑하며 마음을 비워내며, 떠도는 구름 마음을 짚어가며 영원한 나그네 길임을 인정하며 고운 마무리에 몰두하려 한다.
언어가 문을 닫아버린 침묵 속에 잠겨 깊숙한 소리를 만나 내 영혼의 깊은 내면을 보노라면 생의 뒷면에 드리워진 음영의 움직임을 보게 된다. 살아온 여정의 그림자는 가로등 불빛 낭자한 거리를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영상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세월의 소리를 향해 손짓을 해도 미치지 못하고 소리를 외쳐도 되돌아 오지 않는다. 남아 있는 시간이 퇴적될 삶의 두엄을 본다.
머물 듯 흘러가는 것이 세월이라 봄인가 하면 어느 샌가 여름이요, 가을인가 했는데 어느 결에 겨울이었다. 지금이 어디메쯤인가. 여름도 떠나보내고 가을이 금방 다가올 것 같아 가슴이 낙엽처럼 내려앉듯 허리춤이 무르춤하다. 꿈결인양 세월의 덧없음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닌 것인데 계절이 깊어갈수록 바람결에 흐트러지는 미진 같은 세월을 어이 잡아둘 것인가. 오늘이 삶의 마지막이라 여기며 하루 하루들을 따뜻하고 평온한 여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일이다. 행복의 조각들은 아무리 작은 형체를 지녔다 해도 작은 조각들은 다 내 품으로 안겨와 환희를 지를 것 같다. 행복 조각들은 편안한 안녕과 즐거움에 머무르거나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빛나는 증서를 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않아도 어찌 보면 초라해 보일 만큼의 연약함 속에서도 안게 되는 작은 기쁨, 그 기쁨 마저도 함께 누리려는 조화의 어울림을 꿈꿀 수 있는 작은 기쁨을 탐할 수 있는 행복 조각들을 모으고 있다.
흘러 보낸 세월의 소리가 진동과 음파를 타고와 가슴을 두드리기도 한다. 세월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책무감 탓에 세월에 기대고, 세월에 부대낌을 당하기도 하며 세월 급류를 놓지 않으려 세월에 매달리기도 했던 모니터들이 하나씩 낙화하는 꽃잎처럼 꽃 무덤을 만든다. 세월따라 직조해온 시간 매듭들을 눈여겨 바라볼 수 있는 세월의 길목에서 근심이며 가슴앓이, 노심초사도 자취를 감춘다. 여울목을 지나고, 소용돌이 쳤던 그 세월들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머무름의 극치인 체향으로 묵으며 몸을 누이고 싶다.
세월의 소리는 너무 커서 그럴까. 아니면 어찌나 세미한지 스쳐가듯 지나쳐 버렸을까. 때로는 계절에 실리기도 하고 한적한 빗소리에 곁들이기도 하면서 바람 소리에 실려 여울지고 한 조각 구름처럼 유유히 사라져 버리기도 하면서 새 소리에 묻어 오기도 하고, 파도 소리가 되어 일상에 섞이면서 먼 기적 소리를 싣고 와 세월을 알려주기도 했었다.
소리 여운들은 세월을 아주 조금식 헛되이 소모하게 겉태질하기도 하면서 세월이 내뿜는 힘의 수세에 떠밀리기도 하면서 세월이 데려다줄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했으니 말이다. 세월의 연륜은 나지막한 소리로 다가올 노년을 예고해 주었고, 세월의 소리가 가져다 주는 오지랖 앞에서는 침묵을 고수할 수 밖에.
그 시간들 위에 세월의 우직함과 변고 없는 가치는 영원을 향한 빛 부심으로 빛날 것이다. 어딘가 빈틈이 있었고 부족했고, 후회스러움이 밀려드는 노정이었지만 세월 나이테를 세고 있노라면 생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세월이란 무지개가 남기고 간 연륜의 깊고 넓음이 부족한 빈 틈새를 가려 주기도 하고 덮어주고 있었다.
세월이 언뜻 신중하게 물어온다. 지금껏 세월 수레가 이끄는 대로만 묵묵히 따라 왔는가.
목표는 정중히 바라보며 걸어오셨는지요. 세월을 그토록 믿을 수 있었던가요. 흘러가는 세월 속을 동반해온 길벗이 누구였나요, 문득 문득 그리워지는 누군가가 지금껏 메아리 여운으로 남겨진 세월의 소리가 들리시나요. 그랬다. 세월은 믿고 따라 준 만큼 삶의 부피를 살아오도록, 정성의 결정체를 만들 수 있도록, 맡겨도 좋을,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는 힘이 내재된 듬직하고 정갈한 길을 내주고 있었던 것을. 따스한 햇살이 축복이 되고 사랑의 언어들이 희망이 되고 세월의 소리가 살아남을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 남은 날 동안 세월 흐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세월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걸어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