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찰스 H. 스펄전의 일평생 목표의 일관함에서 터득한 신앙의 지혜입니다. 삶의 목표가 삶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우리의 목표는 축 처진 손을 굳게 하고,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움에 있음’을 자각한 영원히 기억될 <영성훈련의 대가의 깨달음>입니다.
초대교회를 늘 활기있게 부흥시킨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희망의 최고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 다윗은 시편 30편 5절에서 동일한 <희망의 최고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희망의 목표가 이토록 선명한 것을 <영혼의 무지몽매함>으로 절망과 낙심에 빠져있는 자들이 <시대의 동반자>인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바울은 로마서 8:26~30에서 본격적으로 <영적 매스>를 꺼내든 것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현하(現下)의 삶이 <희망의 하이라이트> 즉 <희망의 최고점(最高點)>에 있음을 깨우칩니다. ‘무엇이 희망의 최고봉에 서 있게 만든다 말일까?’ 이 희망의 최고점, 희망의 최정상의 분명한 이유가 <본문의 핵심>입니다.
첫번째 이유는, 우리의 <영적 무지(Spiritual Ignorance)>를 강력하게 지원하시는 성령님의 중보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보혜사(保惠師)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천국귀환의 승천 직전>에 약속하신 “예수님의 분신”, 비록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의 역할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영>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상목회를 하실 때, 약한 자의 보호자, 치료자, 변호자, 교사의 역할을 하셔서 “치유, 교육, 설교”에 전념하신 것처럼 성령님의 중보목회는 바로 이와 동일한 목회를 펼쳐나가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함은 <우리의 책임>이요, <우리의 영적 무지>입니다. 이것을 탄식하며 우리 대신 기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요, 이 성령님의 중보기도가 있기에 현하의 우리의 삶의 정황은 희망의 최고점에 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협력의 선>이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선(善)>이십니다. 선(善)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성입니다. 따라서, 선(善)은 희망의 최고점의 본질입니다. 이 거룩한 본질이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회복되고 성취되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증거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통합하고 협치하셔서 우리에게 <협력의 선>이라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총)>의 선물을 주십니다. 이 이유가 있기에 <희망의 최고점>에 우리가 지금 현존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예정(Predestination)>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롬 8:29~30의 결론의 요지입니다. “미리”라는 말씀의 반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은 미리 준비하시고 계획하시고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미리 아신 자들을…미리 정하셨으니…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그러므로 이 미리 예정하신 하나님의 예정이 <희망의 최고점>의 분명한 이유입니다. 세 가지 이유, “성령님의 중보기도”, “하나님의 협력의 선”,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이제 곧 희망의 아침이 동이 트려합니다. 여명의 밝은 아침 직전이 암흑천지인것처럼, 지금 현실이 답답하고 앞이 캄캄하게 보이는 순간이 나에게 희망의 최고점임을 깨닫는다면, 현하(現下), 우리는 절망이 아니요 희망의 최고봉에 희망의 최정상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