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을 두고 ‘냄비 근성’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특유의 화끈한 성격 탓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회 전체가 빠르게 달아오르면서 격분하지만 정작 중장기적인 해결책은 마련하지 못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 냄비 근성 덕분에 빨리빨리 문화가 정착돼 고도 경제 성장의 과실을 누릴 수 있었음을 고려하면 과도하게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것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측면에서도 한국을 냄비에 비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에서 심각한 가계부채 문제가 특히 우려되는 이유는 관련 채무가 단기 연동이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글로벌 긴축 국면에서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도 기준 금리를 빠르게 올렸는데 단기 연동이기 때문에 변동 금리인 가계부채가 갑자기 튀면서 전체 경제가 급냉했다. 한국의 회사채를 살펴봐도 공기업이 아니면 단기채 위주로 채권을 발행하는데 이 역시 단기 위주의 냄비적 성격을 갖고 있는 시장 특성 때문이다.
반면 미국 시장은 냄비가 아닌 뚝배기에 가깝다. 주택담보대출 금리인 모기지를 살펴보면 30년물 상품이 고정 금리로 나온다. 이 때문에 한 번 집을 사면 매달 갚아야 하는 페이먼트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별개로 안정적인 상환이 가능하다. 물론 상업용부동산(CRE) 시장 같이 변동금리에 취약한 시장도 있지만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다. 채권 시장을 살펴보면 애플과 같은 대기업이 30년 이상 장기로 회사채를 발행한 일도 과거에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아니면 이와 같은 장기채 발행은 쉽지 않다.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RB·연준)가 추진하는 통화정책 역시 뚝배기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는 냄비가 빨리 끓는 것과 달리 기준 금리를 올린 정책 효과가 시장에 영향을 미칠 때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림을 의미한다. 작년부터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함께 긴축을 이어왔는데 유독 미국 경제만 아직 활황인 이유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있다. 팬데믹 기간 막대하게 풀린 현금에 더해 긴축 시차 효과가 겹쳐지면서 일종의 착시 효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연준이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기준 금리를 5% 이상까지 올렸는데 미국 주택 시장이 견고한 것도 시장의 뚝배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부동산 시장은 기존 주택 거래가 발생하기 매우 힘든 구조다. 집을 한 채 보유한 사람이 이를 팔고 다른 집으로 이사하려면 기존 집과 연관돼 갚아왔던 저금리의 모기지에서 새집을 사기 위한 고금리 모기지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채무 상황 부담이 극심해진다. 이러한 리스크를 각오하고 이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현금 부자들 밖에 없다. 현재 주택 시장에서 매물이 실종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만 이렇게 끓어오를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미국 금융시장의 특성은 부작용을 낳기 쉽다. 연준 입장에서는 금리를 이렇게까지 올렸는데 인플레이션 문제가 완전 해소되지 않고 집값도 고공행진을 하는 것을 보고 과잉 긴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해 기준 금리를 필요 이상으로 올리면 이는 경기 침체의 씨앗이 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최근 연설에서 ‘신중하게’(carefully)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다.
최근 미국 주택 시장이 여전히 강세지만 불안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준이 금리를 더 이상 올리지 않고 유지하는 구간에서 자산 변동성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에는 인플레이션이 장기화 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과거와 같이 빠른 속도의 금리 인하보다는 꽤 오랜기간 고금리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오늘 발표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결과를 통해 투자자들은 각자 나름의 힌트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에는 연준이 경제 전망을 담은 점도표를 발표하는데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경운 LA미주본사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