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서 후추·정향·육두구 등 향신료는 매우 귀중했다. 음식의 맛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 어느 정도 방부제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지중해로 수입되는 물품의 반 이상이 향신료였을 정도였다. 당시 향신료는 주로 인도·동남아시아 등에서 재배됐다. 그러다보니 향신료는 주로 페르시아만과 홍해를 거쳐 바그다드·알렉산드리아~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베네치아를 거쳐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중국~중앙아시아~이란~레바논 일대를 잇는 유라시아 대륙 내의 실크로드(비단길)와 대비되는 스파이스루트(향신료길)다.
향신료 무역은 기원전부터 시작됐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11세기 후반 베네치아 상인들이 200년 이상 진행된 십자군 원정을 지원하며 세계 향신료 시장을 장악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15세기 말 향신료 수요가 넘쳐나자 포르투갈·스페인이 새 항로 개척에 나서면서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바스쿠 다가마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향신료가 세계사의 문을 열어젖힌 셈이다. 16세기 후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칼레 해전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 격파된 후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상선들이 스파이스루트 무역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등이 9일 인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인도·중동·유럽 경제 회랑’ 구상을 발표했다. 인도에서 해상으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까지 상품과 에너지를 옮긴 뒤 철로·해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이스라엘·튀르키예 등을 거쳐 유럽까지 수송하는 ‘신(新)스파이스루트’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올해 10년을 맞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전략에 대응해 투명하고 지속 가능한 새로운 무역 루트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일대일로와 신스파이스루트의 격돌 등으로 지구촌의 블록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글로벌 질서의 급변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가치동맹을 중시하되 국익을 우선하는 정교한 외교 전략이 절실히 요구된다.
<신경립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