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은퇴 이후 노년의 일상을 백서로 다듬을 요량으로 구상의 도모를 위해 가닥을 잡아가느라 생각이 많아진 이즈음이다. 은퇴자의 특권으로 우선 밥벌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더 없이 홀가분했다. 은퇴를 미루다가 일흔에 들어서면서 우리 집 할배랑 은퇴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터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호사를 누리면서 눈을 뜨자 말자 서둘러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느긋함이 마냥 신기하기 그지 없다. 유년에서 여학생이 되고 여대생이 될 때까지는 철 없던 시절을 보냈지만 아이들을 양육하고 엄마라는 부름을 받으면서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앞만 보고 하루들을 보낸 터라 노년의 삶을 그려볼 여유 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 무렵엔 먼 미래에나 다가올 일 같았는데 얼떨결에 노년이 다가오고 말았다. 할머니라는 부름 조차도 내 생애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왔기에 노년을 예상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젊은 날은 온통 아이들에게로 집중되어 있었기에 아득한 먼 훗날 일로 접어 두면서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도, 경황도 없었다.
‘태어나고 살다가 때가 되면 떠나는 것’ 지구별의 초 간단 순리인 것을 어찌 순리의 과정에 감각이 닿지 않았을까. 퍼뜩 정신이 들고 보니 노년이 되어버린 초로의 할머니 모습으로 발견되다니. 각자의 시간표를 따라 흐르고 흐르다 종국엔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구를 떠날 터이다. 남은 날들을 무량무변으로 대하지 말고 마지막 떠날 때까지 온 우주와 대 자연 기운이 함께 해줄 것이라는 신념을 다시금 붙든다. 하루를 감사하고 자연과 함께 숨쉬고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채득하면서 살아가자고 마음의 비롯을 정비해 본다.
살아온 흔적들이 한 자락 풍경 같다. 계절 실루엣이 노구를 감싸 버렸나 싶은데 노년으로 들어선 깊 섶에는 꿈도 함께 따라 나서고 있다. 노년 백서에 남겨질 계절 순환 흐름 조차 이미 흐려져 가고 있는 건 아닐까. 가을이 들어서는 길목이라 사념이 깊어질 수 밖에. 지금이 현재이고, 현재는 과거로 흘러갔고, 그 날의 과거라는 전철을 밟으며 미래를 밟으며 살아온 것이라 철석같이 믿으며 시류를 따라 흘러왔는데 문득 미래라는 먼 지평 끝에 서 있는 노년의 아낙을 보게 되다니. 과거는 등 뒤에 있는 것으로, 현재는 바로 지금, 미래는 보이지 않는 저 만치의 것으로 알고 지금에 당도했는데, 미래가 안타까워할 만큼 과거를 돌아볼 짬도 없이 등 뒤에다 폐기 처분하 듯 마냥 앞만 보고 걸어왔던 것을. 현재라는 극점 위에서 파라다이스를 향해 달려왔는데 오아시스를 만난 노년의 아낙을 만나게 되다니. 시간 흐름이 여울목 없이 사뭇 유순 했던 탓이려니 해본다. 비행기가 운행되는 경로에서 이륙 순간보다 착륙 과정에 더 집중하게 된다. 각종 경기에서, 특히 체조 경기에서도 훈련으로 단련된 기량을 마음껏 펼친 선수가 가장 멋지고 안정된 경기를 마무리하는 순간의 착지 기술이 가장 어렵고 긴장되는 순간이라 했다. 쌓아온 수고와 경륜이 착지하는 한 순간에 달려있 듯 인생에서도 중요시 해야할 부분이 간결하고 단정한 정돈된 마무리일 것이다.
노년으로 들어서는 길 또한 인생 착지 기간으로 삼으며 마음을 다해 정성을 기울여 고난도 착지를 성공하는 선수들처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극선의 으뜸으로 세워 가야 하리라. ‘어떻게 매주 글을 읽게 해 주시는지’ 감사 어린 인사를 듣게 되면서 동문서답 같은 답을 드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글을 써야 밥을 먹을 수 있는 지경도 아닌 터이지만 마냥 글 쓰기가 좋아서, 쓰고 싶어서, 쓰지 않으면 누군가로부터 면책을 받을 것 같은, 쓰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면구스런 일을 저지르는 것 같은 확인할 길이 막연한 부추김에 떠밀려 글을 쓰고 있다는 답변을 드렸었다. 하지만 인생 여정의 절기가 이미 육신의 계절로는 초겨울로 들어선 시점이라 자연스레 남은 날을 계수하게 되면서 언제까지 써질지 모르는 글쓰기가 써지지 않는 날 앞에 우뚝 서 버릴 것 같은 예감이 촉박한 듯 다가와 있다.
남은 시간들의 재촉에 시달리는 간절함이 때로는 글 쓰기를 북돋우는 증폭의 힘으로 작용 되지만, 남은 날이 더 짧다는 초조감이 빚어낸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글을 써야 한다는 의지가 확대되기도 하나보다. 돋보기에 의존하는 책 읽기도 수명이 다할 때가 있을 것이라서 손 끝에 힘이 남아 있는 한 책 읽기에 게으르지 않으며, 힘 닿을 때까지 자강 불심 꾸준히 글을 써 보자며 노년에 접어든 작가에게 부추김의 응원을 보탠다. 조금 허술해 보이더라도 순수의 결실이 깃들어 있는 평안의 피안에서 머물다 고별을 나누고 싶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 길은 고달팠지만 행복 했노라고, 느린 걸음이지만 유쾌한 행보 였음을 일러주 듯 일일이 나누고 떠나고 싶다. 그림자로나마 내 글줄 곁에 머물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다.
노년 백서 흐름을 노년기 지형에 나타나는 노년 곡만의 경사를 완만하게 그려보려 한다. 넘치지 않으며 모자람이 눈에 뜨일지라도, 보기에도 아름답고 안정된 끝 맺음을 위해 최선을 다 해야할 마지막 과제가 남겨져 있음을 본다. 저무는 여름과 결실의 가을 초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