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변화’라는 말이 참 많이 쓰인다. 기업이나 단체들은 앞 다투어 변화를 외친다. 경제적 양극화, 제4차 산업혁명, 코로나 팬데믹, 기후재앙시대, 인간 100세 고령화시대, 챗GPT 등은 우리에게 진지하게 변화를 생각하게 한다.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영글어가며 쑥쑥 무성하게 자라는 식물이나 계절의 흐름,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바람과 구름이 전하는 만고불변의 메시지는 ‘변화’이다.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을 남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존재의 본질로 이해하였다. 변화는 자연과 우주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우주의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
변화란 무엇인가? 변화는 인간과 만물의 존재 실현의 과정이다. 변화란 자신과 이웃 자연의 모든 생명을 위하여 더 가치 있는 삶 곧 ‘진선미’의 삶을 향한 의지적 움직임이다. 진선미를 향한 몸과 마음의 지향성을 담은 움직임이 변화다. 니체는 인간을 ‘극복’되어야하는 존재로 보았다. 변화적 존재로 본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찾아온 고통과 시련 허무의 현실을 극복하고 변화를 이루어가는 이상적 인간을 ‘위버멘쉬(Ubermensch, 초인)라 불렀다. 자기극복을 향한 치열한 근원적 변화를 추구하는 삶을 온전한 사람됨의 본질로 본 듯하다.
변화의 무풍지대는 없다. 자연이나 기업도 그리고 우리 몸 안의 세포나 피부도 매일 변한다. 변해야 산다. 불변, 불통은 죽음이다.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변화는 살아있음의 증거다. 변화는 참 사람됨을 향한 신진대사다.
변화를 생각할 때 나보다 ‘너’의 변화를 요구하거나 혹은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변화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오, 그렇지 않다. “모두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 변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내가 먼저 변해야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변화의 시작은 나로부터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주장한 공자는 자기의 탐욕, 무지, 무정(無情)을 극복하고 인간과 하늘의 도리로 돌아가는 ‘자기 변혁’을 세상 변화의 처음과 끝으로 보았다. 변화의 자리는 내 마음이요, 나의 생각이요, 나의 삶의 방식이다.
성경 메시지의 핵심 역시 변화이다. 구약성경 예언서의 핵심 메시지는 불의한 길과 생각에서 ‘돌이키고, 고치고, 돌아오라’, 못된 생활태도를 ‘고치고 바르게 하라’, 변화의 외침이다. 예수님의 “회개하라”는 말씀도 “생각을 바꾸어라”(Change your mind), 곧 마음과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변화의 부르심이다.
날마다 변화를 추구해야한다. 변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변화의 길은 자신의 존재 실현과 진선미의 세상을 희망하는 학인(學人)의 마음에서 나오는 배움과 겸손한 자기 비움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절대자) 또는 진리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도덕경에 나오는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의 의미가 대략 이와 같을 듯하다. 진정한 변화의 길은 학(學)과 도(道)에 있다. 변화는 학, 곧 열린 마음에서 일어나는 지식 추구와 정보 확장을 통하여 그리고 도, 곧 종교나 구도적 수행의 과정에서 체험하는 하느님(하늘)과 만남에서 나오는 자기 비움과 기도를 통하여 일어난다.
진정한 변화는 내 마음의 중심(속사람)을 변화시키고 주변을 변화시킨다. 한 시인은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 내가 먼저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것…’(박노해 ‘나 하나의 혁명이’) 그것이 진리와 희망의 모든 것이요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시작과 끝이라 말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변화된 한 개인의 열정과 꿈이 대중과 세상의 변화로 이어지는 감동적이고 숭고한 사건들을 본다. 진정한 변화, 나를 참 사람됨으로 이끌어가며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존재 방식이다.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