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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뒷짐 진 삶에게 던지는 질문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7-27 10:43:37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뒷짐 진 삶에게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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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평소 같으면 골프를 치고 돌아와 가방만 슬쩍 던져놓고는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던 과묵한 남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큼지막한 목소리로 "여보!"를 외치며 들어섰다.

"여보, 나 오늘 골프장에서 누구 만났는지 알아? 신 장로님 부부를 만났잖아!"

들뜬 남편의 목소리에 스무 해 넘게 잊고 지내던 이름 하나가 솟아올랐다. 신 장로님 부부.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옛 기억이 남편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눈앞으로 끌려 내려왔다.

젊은 시절, 새로 이사한 지역에서 새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온통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서먹해하던 우리 부부에게 먼저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준 집사 부부가 있었다. 집수리할 곳이 있다고 하면 선뜻 업자를 알선해주고 자동차도 손봐주었으며, 집으로 초대해 정성껏 차린 음식을 대접해 주기도 했다. 가뭄의 단비 같던 그들과 또래였던 우리는 금세 친해져 가깝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 장로님 부부가 나를 따로 부르셨다. 당시 연배가 삼촌뻘쯤 되시던 장로님은 진지한 눈빛으로 뜻밖의 충고를 건네셨다. 한동안 지켜보니 그 집사 부부와 우리 부부는 결이 많이 다른 듯하니, 성급하지 않게 좀 더 살피며 관계를 맺는 게 좋을 거란 말씀이었다. 양쪽 모두 교회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기에 장로님의 말씀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남의 뒷말을 하실 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 집사 부부를 왜 경계하라는 건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르신의 연륜을 믿고 그 충고에 따라 그 부부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그 동네에서 오래 머물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신 장로님의 충고가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선물이었는지를. 다정하게 다가왔던 그 집사 부부의 친절함 뒤에는 남을 이용하려는 계산과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었고, 그들의 가정 또한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그 시절 장로님 부부의 충고가 없었더라면 우리 부부 역시 큰 상처와 손해를 입었을 것이었다.

신 장로님의 그 옛날 ‘참견’이 지닌 무게를 가만히 가늠해 본다. 사실 장로님 입장에서는 타인의 교우 관계에 참견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오해나 비난을 살 수도 있었다. 뒷짐 지고 모른 척 지나치는 것이 훨씬 편한 길이었을 터다. 그럼에도 다른 이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고 우리 부부가 겪을 시행착오를 못 본 척하지 않고 슬며시 충고를 건네주셨던 그 마음은 신앙인으로서 실천해 보인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지금 내 나이가 그때 장로님의 나이와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문득 얼마 전 '나 몰라라' 하며 외면했던 누군가의 일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뜨끔해졌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더 방관자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뻔히 속사정을 알면서도 모른 척 시선을 돌리고, 누군가 불평을 늘어놓으면 그저 피하기 위해 진정성 없는 동조를 보냈다. 타인의 실수가 어떤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올지 눈에 선히 보이면서도 "제 인생이지, 남들도 다 입 다물고 사는데 내가 뭐라고 나서는가" 하며 뒷짐을 졌다. 훗날 일이 터지고 나서야 마음속으로 "거봐,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며 비겁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나이가 드니 기력이 딸려서 그렇다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어왔지만,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의 이런 변화는 과연 나이듦의 삶을 깊이 이해한 자의 느긋함일까, 안일함을 쫓아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의 비겁한 핑계였을까. 남편이 가져온 스무 해 만의 안부 덕분에 지난날의 기억을 끌어올린 오늘, 무관심이라는 편안함 뒤에 숨어 있던 나의 게으른 삶을 가만히 돌아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세상사나 인간사에서 뒷짐을 질 수 있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연륜이란 삶의 피로를 이유로 서늘한 방관자의 대열로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았던 옛 다정함을 다시 세상에 되돌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젊을 때처럼 손해를 감수하면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 줄 기력은 없을지라도, 타인의 슬픔이나 실수를 향해 조용히 손을 내밀어주는 따뜻한 관심마저 거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 옛날 신 장로님의 충고 덕분에 내 삶의 작은 장애물을 무사히 넘어섰듯,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 작은 등불을 비춰주는 '다정한 참견'의 온기만큼은 결코 잃지 않고 살자는 다짐을 해 본다. 그래, 이제라도 방관자의 서늘한 그늘을 벗어나, 다정한 참견이 주는 따스한 햇살 쪽으로 마음을 옮겨 놓자. 아직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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