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우리는 하나님의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받는 대상인데 우리를 그 사랑으로부터 빼앗으려고 하는 무엇이 나타날 때 우리의 사랑을 독점하시려는 그 분의 불 같은 진노는 사랑의 깊이만큼이나 뜨겁습니다. 아름다운 여성 하나를 놓고 두 남자가 칼을 빼는 것은 사랑에 눈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사랑의 관계를 나누지 못하느니 차라리 세상과 결별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입니다. 사랑은 비교나 계산의 결과가 가져다 준 상대적인 선택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필연이며 숙명과 같은 매임이 바로 사랑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어른들과의 의견 차이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특히 사랑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들에게 부와 명예, 장래가 보장된 안락한 사람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면서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와 그런 관계 속에 매이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불만족과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자기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책임없는 아르바이트생의 부업 활동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제일 가는 본분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 인생에 있어서 부업 같은 일일 수 없습니다. 그의 가장 큰 자랑은 그분께 사랑받는 것이고 그의 가장 큰 기쁨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일이 독자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본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랑은 항상 불변하는 보석과 같이 소설의 테마가 되고, 그 사랑이 갖는 절대적인 가치가 쉼 없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사랑에 약한 인간의 이런 감정을 이용해서 거짓 사랑으로 이익을 갈취하거나 상대방을 불행에 떨어지게 하거나 나쁜일에 이용하는 사악한 일들도 언제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악 가운데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것만큼 악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순결한 사랑을 보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한 율법사가 물었던 질문을 기억해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6-38)
결국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을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계명 준수의 핵심부에 깃들여 있는 것은 영혼 사랑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런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고 신약시대에는 이런 사랑이 사라진 상태에서 천사의 말을 하고 방언을 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그 모든 섬김과 헌신의 동기가 되고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때에만 인간의 모든 은사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은 모든 애씀과 수고는 세상 끝 날에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렇게 멸시를 받으면서도 이 세상에 있는 것과 주님의 사랑을 바꾸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은총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할 때만 우리의 삶을 움직일 수 있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