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한 나절까지 간간이 햇살이 보이는 흐린 날씨였는데 오후가 되자 두툼한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빠르게 이동하더니 하늘이 용트림을 하며 강한 바람을 쏟아내더니 수목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돌풍의 들숨과 날숨 사이로 엄청난 비가 퍼부어 댄다. 한동안 뜸했던 비 냄새가 새삼스레 마음을 설레게 한다. 비가 쏟아지자 감정선을 터치 당한 것 마냥 실체가 불분명한 격앙된 힘이 솟아난다. 몸도 마음도 풍선처럼 두둥실 해진다. 갑자기 목적지 없이 빗속을 달리고 달리는 상상에 붙잡힌다. 한 더위에 달구어진 대기를 순식간에 장악한 빗줄기가 무방비 상태 대지에 파열하 듯 장렬하게 쏟아진다. 초록을 머금은 유리창에 방울방울 사념이 매달린다. 창을 두드리 듯 세차게 퍼붓는 빗방울이 혈관에 주입되는 링거액처럼 메마른 세상을 빠르게 타고 스며들어 대지를 적신다. 숨가쁘게 쏟아지던 위세가 점차 줄어들면서 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사연이 송알송알 맺힌다.
수증기로 상천할 만큼의 무게로 어김없이 증발되어 하늘에 이른 물 알갱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거침없는 낙하를 통해 비로소 존재 이유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한다. 비는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지는 은혜였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가로수 몸부림은 더 격렬해진다. 서서히 창에 들러 붙는 빗방울 질감도 달라진다. 빗줄기가 한 덩어리로 밀착되며 어느덧 창을 때리던 속도감마저 사라진다. 우주적 진공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질구레한 잡념들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마침내 비 내리는 날의 창문이 느낌표 하나로 존재하고 만다. 떨어지는 비는 창 아무데나 들이치고는 이미 붙어있는 방울을 만나 합쳐지면서 커져간다. 아주 크게 자라버린 방울은 제 무게에 흘러내릴 수 밖에 없어 나란히 줄을 잇고 있는 다른 빗방울 흔적도 지워가며 흘러내린다. 계속 긋고 지우는 빗방울의 난무가 낙서 같으면서도 유리 창을 캔버스로 한 자연 행위 미술이다. 이처럼 비는 인생들에게 평화와 아름다움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지구 온난화가 빚은 재난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물난리를 일으키고 가산을 휩쓸기도 하고 생때같은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인류 문화 발달 구현이 초래한 역학적 귀결 이다. 기후 변화 피해를 완화시키려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이성과 유리창에 무심히 들이치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감성과 연결된 구상으로 자연을 향한 인류의 마지막 사랑이 아닐까 한다. 인간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물에서 배워야 할 것이 산재해 있다.
어이 된 영문인지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이 좋다. 촉촉히 세월 속으로 젖어 드는 느낌이랄까. 어릴 적 고향 풍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어 더욱 좋다.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더 좋은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정서 가운데 하나이다.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유럽의 어느 도시를 동경해 보는 정서에 잠길 수 있어서 인가보다. 어찌 보면 우리네 인생에도 비가 내린다. 마음 속에도 비가 내리지만, 때로는 뜨거운 비로 마음을 잔잔하게 적시기도 한다. 천진한 아이들은 빗속에서 뛰놀기도 한다. 비가 내려야 오곡이 결실을 맺고 산천 초목도 제 본분 껏 자연 섭리에 충실했음을 내밀 수 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빗줄기를 바라보노라면, 와이퍼가 지나간 유리창처럼 맑고 간결한 마음이 된다.
유난히 비를 탄다는 것은 남다르게 마음 정화가 필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화에의 요구가 유달라 세상을 씻어 낼 수 있는 비 오는 날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싶다. 마음 정화 욕구가 남다른 것은 그만큼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소유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존재하느라 일그러진 상처 파편들이 누구보다 많아서 일까. 그것들을 걸러내는 정화 작용이 더 자주 요구되는 것 일수도 있겠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문득 문득 생과 사의 감각이 환하게 다가 온다. 얽힌 실타래 같이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단순하게 정리되면서 얽힘을 제공하는 것들로부터 초탈하 듯 달관에 이르는 심사가 된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가뭇없는 존재 들인지. 미약한 생명을 지탱해오느라 지금까지 힘차게 박동해온 내 심장에 대해 아예 숙연해지고 만다.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다니기를 피하게 되고 활동에 제약을 받지만 맑은 날에 만날 수 없는 빗방울 향연이 고아하다. 무념무상으로 들이치는 빗방울은 유리창에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세로로 선을 긋고 있다. 연속적인 선이 아니라 점점이 찍어낸 물방울들이 일렬로 늘어서며 우주 존재 원리의 순간과 영원을 포착해낸 감동적인 순간을 그려낸 작품이다. 광대한 우주를 배경 삼은 빗방울 작품전을 감상하면서 문득 사랑 없는 세상에 작은 풀 씨 같은 사랑이라도 심어가야 할 것이라는 다짐이 밀려든다. 심기만 하면 하늘이 내려주시는 은혜의 비가 생장을 도와줄 터이니까. 아름다운 그림이나 감동적인 시가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만큼 빗줄기 또한 그러하다. 훌륭한 예술이 마음을 한껏 드높여 주듯 비도 정신과 영혼을 한 단계 승화시켜 주기도 한다. 이렇 듯 고양된 느낌은 세상 분진으로 얼룩진 우리 존재를 정화시켜 주기에 족하다. 유리창에 들치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감성과 연결된다. 생명에 대한 외경심 고갈까지. 비를 바라보는 마음 위에 창 앞에 놓아둔 커피잔의 향이 사뭇 쓸쓸함과 진한 고혹적 잔상을 은은하게 실어 나른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