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그의 저서 <참 목자상>에서 “태만(怠慢)은 겸손을 가장하며, 태만은 성령을 소멸하면서도 성령이 그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게으르지 말고 성령 안에서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고 <참 목자상>의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잠언 19장 15절에서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고 태만의 실상을 과감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개혁주의자, 사도 바울은 태만과 열심은 상반대되는 목적을 추구함을 예언하였습니다.
로마서 12장 11절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지혜서와 신약의 바울 서신서에서 <태만(怠慢)>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우리 영혼의 적, 즉 <가장된 겸손>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신랄하게 그 실체를 밝혔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심각한 영적 위기 속에서 영적으로 스스로 만족하다고 자만하며 구태의연(舊態依然)하게 좌시할 때가 아니라 신앙의 개혁(Reformation)을 일으켜 분연히 일어설 때입니다. 이 시대는 탁상공론에서 참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안일하게 게으른 연구에만 몰두하는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태만(怠慢)은 단순히 <게으름>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실상의 악이 너무나 참담하고 무책임한 <거짓 열심의 원흉>임을 알아야 합니다. 리챠드 백스터의 신앙개혁은 태만(怠慢)이 <겸손의 숨겨진 적(敵)>인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최악의 본질>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하나님 앞에서 성령을 가장한 자만심, 겸손을 가장한 태만이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고 스스로 치부하면서 손을 놓고 가만히 있게 한다는 것을 직시해야 비로소 성령을 소멸치 않을 뿐 아니라, 참 겸손으로 오직 성령만이 온전하게 우리의 구태의연한 신앙을 개혁하고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분연히 일어서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태만을 직시할 때, 성령의 임재를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지 않으면 지금이 자다가 깰 때임을 망각한 채 하나님의 때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타인의 태만에는 냉혹하면서도, 자신의 태만에는 관대한 자세로 대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만을 냉정하게 깨닫고 철저히 돌아섬으로써 더 이상 영혼의 나약함에 무너지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고 분발하게 됩니다. 태만은 영혼의 타락의 앞잡이입니다. 태만은 스스로 자만하게 만드는 유혹의 마귀입니다. 이에 반하여,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입니다(잠언 18:12). 참 겸손은 태만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늘 태만을 경계하면서 게으르지 말고 성령 안에서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김으로 겸손을 가장한 태만의 실상에서 벗어나게 되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목자상>을 온 몸으로, 온 맘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 입어 기필코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1장 2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