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용(전 한민신보 발행인)
지금 한국에선 통일문제 논의가 자취를 감춘 상태다. 금년 들어 우리 정치계에서 통일문제를 놓고 심도 있게 토론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기억조차 없는 것 같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 남북통일이야말로 국운, 미래가 걸려있는 절체절명의 우선과제가 아닌가. 그런데도 통일 문제를 자주 거론만 해도 성향, 사상문제를 의심받는 풍조가 만성화돼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 보수 진보 후보들이 강경대응론과 타협 유화론으로 잠깐 설전을 벌였을 뿐 그 이후론 정치권에서 화제에 오른 적이 전혀 없을 정도다. 핵무기를 앞세운 북한의 남한 적화통일론에 맞선 남한의 ‘핵포기 대가 경제원조’ 제안 정도가 오고 갈 뿐 남북관계는 꽉 막혀있는 상태다.
북한의 의도를 요약하면 자신들의 체제를 간섭하면 핵무기로 대항하겠다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의 핵 보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정권붕괴 음모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체제보장, 핵 보유에 관한 한 어떤 협상에도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태도다.
남한의 대북통일정책에도 확실한 지표가 없다. ‘북한 자유화’라는 포부만이 이어져올 뿐 통일된 나라를 어떤 철학으로 어떻게 이끌겠다는 납득할 만한 제안이 없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도 미국의 핵무기로 맞대응한다는 초강경론까지 발표한 상태다.
여야의 대북 목소리도 제각각이다. 이렇게 극심한 내부 분열 상태에서 일관된 대북정책이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미국, 중국으로 압축되어있는 외세의 영향력도 남북통일에 주된 장애요소다. 북한과 중국과의 밀고 당기기 복잡한 내용, 미국에 대해 거의 발언권이 없는 남한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저절로 긴 한숨이 나온다. 아무튼 강대국 어느 나라도 한반도 통일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남북 모두가 통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다. 비록 경제 강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같은 민족끼리 극한 대치 분단상태에 있으니 비할 바 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처지가 아닌가. 우리는 분명 정의감이 있고 용기 있는 민족이다. 지혜와 슬기도 넘치는 민족이다. 다만 오랜 시간 외세에 시달려온 탓인지 상호 간에 신뢰가 부족한 점이 아쉽다. 상대를 불신하면 오해와 충돌이 빚어지게 마련이다.
남북이 불신을 버리고 신뢰의 길을 택한다면 얼마든지 민족통일의 가닥을 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외세의 압력이 가중될수록 남과 북은 처절한 신뢰와 단결로 대항해야 한다. 남북 정권은 한 발씩만 양보해야 한다. 외세로부터 받아 마신 해묵은 보수 진보 독극물을 토해버리고 순수 우리 것을 마시고 숨 쉬어야 화합의 길이 열린다.
우리에겐 1972년 7월4일 남북 공동성명을 채택한 기록이 있다. 민족통일의 성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성명은 통일의 원칙으로 1.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2.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3.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 천명하였다. 전 민족이 길이길이 새겨두어야 할 명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