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희 (LA미주본사 논설실장)
2020년 5월25일, 미국에서 흑백 인종문제가 첨예하게 부딪친 두 개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하나는 미네소타주에서 흑인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숨을 쉴 수 없다”고 애원하다가 숨진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새를 관찰하던 흑인남성과 개를 산책시키던 백인여성 사이에 일어난 짧은 소동이 그것이다.
메모리얼 데이에 일어난 두 사건은 코로나 팬데믹 초기, 다들 불안한 심정으로 갇혀있던 시기에 터져 나와 전국적인 뉴스가 됐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스마트 폰으로 녹화되어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되지 않았더라면 진실이 밝혀지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비극으로 끝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BLM(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운동을 촉발시켜 미국의 인종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은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한편 센트럴파크 사건은 얼마 후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당사자 두 사람은 그로 인해 인생행로가 완전히 달라지는 대반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흑인남성은 크리스천 쿠퍼, 백인여성은 에이미 쿠퍼, 공교롭게도 두 주인공의 라스트네임이 같은 이 사건은 그날 새벽 일찍 크리스천 쿠퍼가 자전거를 타고 센트럴파크로 달려가면서 시작되었다. 조류관찰의 최적지로 꼽히는 램블(The Ramble, 공원 내 삼림지대)에서 희귀한 아메리카솔새를 찾고 있던 그는 갑자기 정적을 깨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멈춰섰다. 한 여인이 공원에 풀어놓은 개를 부르는 소리였다. 램블은 수많은 희귀 동식물의 서식지여서 “개는 항상 목줄을 채워야한다”는 규칙이 입구에 적혀있을 만큼 조용한 환경이 중요한 곳이다.
크리스천은 그 여인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만한 거리(20피트)까지 다가가서 개를 목줄에 묶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온 세상이 아는 이야기다. 개 주인 에이미 쿠퍼는 흥분하여 소리치기 시작했고 911에 전화해 “흑인 남성이 나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빨리 경찰을 보내달라”고 울부짖었다. 이런 경우 목격자나 증거가 없으면 십중팔구 흑인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크리스천은 상황이 이상해졌을 때부터 아이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고, 에이미는 더 길길이 뛰며 찍지 말라고 소리쳤다.
이를 기록한 70초짜리 영상은 그날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수천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영상에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크리스천의 침착한 대처에 찬사와 지지가 쏟아진 반면, ‘무개념녀’ 에이미에 대한 비난은 극에 달했다. 단지 개에 목줄을 채워달라고 부탁했을 뿐인데 ‘흑인남성’(African American man)이란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며 생명을 위협한다고 신고한 그녀의 911통화는 모든 흑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미국백인들의 편견과 일상적인 인종차별을 가감 없이 보여준 것이었다.
이 사건 후 크리스천 쿠퍼(59)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그는 원래 조류보호 커뮤니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프로 버더(birder)이다. ‘손에 망원경을 달고 태어났다’는 말을 들을 만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새를 보러 다닌 그는 학창시절 하버드대학 조류클럽의 회장이었고, 세계적인 조류보호단체 ‘오두본’ 소사이어티의 이사이며, 램블의 버더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탐조자로 꼽혀왔다.
그런 그가 조류세계에서 더욱 유명해진 것은 물론, 급기야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채널 ‘내셔널지오그래픽’으로부터 새 프로그램의 호스트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뛰어난 탐조꾼’(Extraordinary Birder)이란 제목의 이 쇼는 쿠퍼가 알래스카에서 푸에르토리코까지, 사막과 도시와 열대우림 등 전 세계에 서식하는 새들을 찾아다니며 ‘버딩’의 기쁨과 경이를 생생하게 전하는 내용으로 오는 6월17일 첫 방영이 시작되며 6회의 에피소드가 예정돼있다.
그뿐 아니다. ‘스타 트렉’과 ‘마블’ 코믹스의 작가이며 에디터였던 쿠퍼는 자기 이야기를 담은 책(‘Better Living Through Birding’)을 집필, 6월13일 출간을 앞두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버딩의 복음’을 전하며 살고 싶었다는 그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에이미 쿠퍼(42)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는 사건 바로 다음날, 다니던 프랭클린 템플턴 자산운용사에서 해고됐다. 이 회사는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우리는 어떤 인종차별도 허용하지 않는다”면서 보험투자 책임자였던 에이미의 해고 사실을 알렸다.
그로부터 40여일 후인 7월초 맨해튼지방검찰은 그녀를 위급상황이 아닌데도 거짓말로 경찰을 부른 허위신고 혐의로 기소했다. 최대 징역 1년까지 가능한 3급 경범죄다. 에이미는 인종차별과 편견에 관한 5회의 교육과 치료 프로그램을 수료했고 다음해 2월 기소가 철회됐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사건 발생 1년이 지난 2021년 5월25일, 그녀는 부당해고와 명예훼손을 사유로 프랭클린 템플턴사를 고소했다. 소장에서 그는 “크리스천 쿠퍼는 센트럴파크에서 목줄 없이 다니는 개의 소유주들을 협박하는 이력을 가진 자로서, 개와 주인들에게 공포를 조장해왔다”면서 자신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고, 사건의 발단은 흑인남성 탓이라고 주장했다.
회사 측은 근거없는 주장이라며 소의 기각을 요청했고, 맨해튼 연방법원은 2022년 9월 이를 기각했다. 그런데 아직도 끝이 아니다. 바로 보름전인 지난 5월19일, 에이미가 항소를 제기한 것이다. 이 여자는 구제불능이다.
3년전 새벽 센트럴파크의 사건을 우리가 많이 쓰는 사자성어로 요약해보면 이렇게 되겠다. 크리스천 쿠퍼에게는 전화위복이요 새옹지마이고, 적반하장 에이미 쿠퍼에게는 사필귀정, 권선징악의 심판이 내려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