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길(수필가)
34년전 한국은 그렇고 그런 나라였다. 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미국에 이민 왔다. 두 차례 일이 있어 잠깐 한국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처남, 처제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승합차를 대여해 15일 일정으로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와 서울의 변한 모습을 보기로 했다.
서울이나 지방도시 시골까지 고층 아파트 숲을 이루었다. 주택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책일지 몰라도 재난이라도 닥치면 어쩔까 염려가 앞섰다.
“땅이 좁아 하늘로 솟았나/땅 값이 비싸 공짜인 공중으로 올랐나// 콩크리트 벽에 갇히어/이웃간의 정은 멀어지고/땅에서 멀어지고/흙냄새 잊어버리면//마음도 메말라/어찌하려고/행여/화재나 지진이라도 나면/어찌 하라고”
어디를 가나 푸른 숲이 보기 좋았다. 민둥산이 가난의 상징이었다면 우거진 숲은 생활의 윤택함과 희망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신안의 임자도, 거제의 외도는 화원과 꽃을 가꾸어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가난한 어촌이 색깔이 없는 땅이었다면 색깔이 있는 땅은 풍요로움의 약속일 것이다.
남해안 고속도로를 가다 보면 호남과 영남의 차이는 표지판 하나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나 다르다고 보고 듣는다. 마음이 달라 남과 북으로 갈리었고 또 동서가 한마음이 되지 못하면 나라의 앞날이 암울해질 것이다.
맛집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탓인지 15일 동안 우리를 감탄시킨 식사를 못 했다. 서울의 합정동 지하식당 ‘우거지탕’과 여수의 조그마한 식당 ‘갈치조림’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내 고향 법성포의 ‘굴비 정식’을 먹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서울의 명동 S호텔에서 이른 아침 부모님 산소를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중국인 가족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눈다. 그들에게 미소를 던지고 거리로 나왔다. 높은 빌딩들은 위압감을 줄 뿐 아니라 방향감각을 잃게 하였다.
지나는 사람에게 남대문 방향을 물으니 못들은 척 지나고 길에서 일하는 젊은이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손을 젓는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 고국 땅에 와서도 영어로 말을 해야 하나 한참을 서서 표지판을 보고 길을 건너 택시를 탔다. 나이 지긋한 기사님에게 ‘영어 간판이 왜 이렇게 많은가요’ 물었더니 자기도 영어로 된 호텔 이름들이 헷갈려 애를 먹는다고 했다. 서울은 물론 전주, 목포, 부산 등 거리나 호텔에서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여행 마지막 날 동대문시장에 갔더니 외국인들이 북적거렸다. 값싸고 좋은 물건을 사려고 ‘샤핑 관광’을 온 걸까 혼자 생각했다. 우리는 내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또 다른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