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최(수필가)
모 대학의 J교수는 세칭 일류대학을 나와서 큰 어려움 없이 교수가 되었다. 반드시 사법고시를 붙어야 좋은 신부감을 얻는 건 아니었다. 교수가 된 그에게도 좋은 혼처가 나타났다. 미모도 흠잡을 곳이 없는데다 처가의 경제적 능력이 열쇠 3개가 문제가 아니었다.
걱정 없이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이들 부부도 중년에 접어들자 아내에게 갱년기가 찾아왔고, 아내는 부부가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J교수는 50대의 건강한 남성이다. 교수 생활도, 친구 관계도, 사회생활에서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아내가 잠자리를 해주지 않는 것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
이때쯤 학교 인근 단골 커피숍 주인 여자의 친절에 빠져 문을 닫는 일요일엔 함께 영화구경도 가고, J교수의 취향을 따라 미술관의 전시회에도 갔다. 두 사람은 다정한 연인이 되었다.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해도 견딜 만 했다.
하루는 그녀가 강릉에 가서 겨울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다. 싫지 않았다. 여자가 먼저 제안을 했을 땐 그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 리 없었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으나 당신이 잠자리를 외면한 것 때문에 생긴 일이니 원망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언젠가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아내가 임신 중 만삭이 가까워 왔을 때 아내와의 잠자리 문제로 힘들어하자 어느 날 봉투를 하나 내밀며 이 돈으로 친구들과 술도 한잔하고 몸 풀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지혜로운(?) 아내도 있는데 당신은 차갑기만 하니….
J교수는 다른 이성과의 여행이 처음이라 떨리기는 했지만 KTX가 서울역을 출발하자 옆에 앉은 S만 보였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가슴이 이렇게 뜨거울 줄은 몰랐다. S는 20세 연하다. 꿈속 같은 2박3일의 겨울 바다 여행을 끝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
3개월쯤 지났을 무렵 S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갔다. 뭔가 모를 불안감이 뇌리를 스쳐갔다. “교수님 저 임신했어요. 지난주 병원에 갔었는데 3개월 되었대요” J교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S가 그리 막된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잘 설득하면 될 것으로 믿었다.
“아기는 지우는 게 좋겠어, 내 입장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S는 단호하게 낳고 싶다고 했다. 그날 설득에 실패하고 J교수는 깊은 시름에 빠져 식음을 전폐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사람들은 외도를 수없이 하고도 별 탈 없이 잘 지내던데 나는 왜 생전 처음 저지른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만은 지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1년여를 잠적해버렸던 S에게서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에 갔더니 S가 아이를 낳아 안고 있었다. “교수님 아이예요!”
J교수는 앞이 캄캄했다. 돈을 주어 달래보려고도 했지만 S는 아빠 없이 키우는 건 싫다고 했다. 만약에 자기 뜻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이를 안고 학교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J교수는 학교를 스스로 그만 둘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어차피 아내도 알게 될 것이고, 직장도 아내도 모두 잃을 처지가 되었다. 한가지 길 밖에 없었다.
전 재산을 아내에게 주고 자신은 직장을 가지고 S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살기로 했다. 행복했던 삶이 뿌리째 뽑혀버린 것이다.
그는 홀어머니가 살다가 남기고 가신 조그만 콘도에서 S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키우며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천달러, 만달러를 먹어도 탈이 없는 돈이 있는가 하면, 단돈 1달러라도 먹으면 탈이 나는 돈도 있다. 그 일로 인해 고개를 숙인 채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J교수, 평생 성실하게 학생들 가르치는 일 밖에 모르고 살아온 그에게 단 한 번의 지혜롭지 못한 실수는 너무나 가혹했다. 행복을 팔아 불행을 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