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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봄을 걷나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3-05-08 17:36:16

삶과 생각, 김지나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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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메릴랜드)

또 다른 봄이 찾아왔다. 수없이 많이 맞이한 봄이건만 매번 색다른 색감으로 불쑥 내게 다가온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높다랗고 앙상한 검은 나무줄기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린 싹은 찡그린 내 눈동자로 흐릿하게 들어오고, 연분홍 매화는 이슬이 맺혀 꽃인 듯 꽃이 아닌 듯 흐드러져 피어올라 퍼져있어 아직은 완연한 봄을 한참은 기다려야 할 듯하다.

살랑이는 민들레 홀씨는 바람 따라 저만치 들에 핀 꽃에 들러 속살이 나올듯한 부끄러운 얼굴로 슬쩍 뺨을 비비더니 홀연히 떠나버리고, 가지가지에 옅게 번지는 새싹에도 슬쩍 기대어보지만 가볍게 부는 산들바람에 또 슬쩍 얼굴을 돌린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시간은 너무 가파르다. 인간계에서는 4계절이 아닌 5 계절이 있어야 마땅하다. 특히 봄은 어떤 이에게는 기쁘지만은 않다. 겨우내 웅크리기 좋은 환경에서 조용히 지내온 고슴도치나 뱀, 그리고 곰 같은 겨울잠을 자는 이들에게 봄기운이 깨우는 새벽의 선선함이 즐겁지 않다. 

겨울에서 봄이 오는 속도를 이해하는 건 인간뿐이다. 추운 계절이 지났으니 정신을 가다듬고 따뜻한 햇살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오로지 인간의 뇌뿐이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대지를 달구고 그 대지의 기운이 여름으로 치닫는 그 짧은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태어나자마자 뽀얀 살결로 통통한 볼과 새하얀 입김, 그리고 불그스레한 살찐 엉덩이는 인간의 아기와 봄의 새싹이 꼭 닮았다. 엄마의 자궁에서 나온 아기의 여린 살결은 마른 가지에서 삐죽이 나온 통통하고 연한 연둣빛 싹과 같다. 겨우내 얼었다가 녹고 또 얼었다가 녹아 바람결을 견뎌낸 앙상한 검은 가지지만 그 단단함에서 오래된 나뭇결을 뚫고 나온 생명의 싹은 아기의 울음처럼 싱그럽게 벅차다. 찢어질 듯한 고통으로 아기를 탄생시킨 고귀한 어미의 거친 울부짖음은 죽은 듯 단단히 서 있는 검은 나무의 질긴 나뭇결의 거침과 같다.

조그만 새싹들은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멋지게 자라날지 모른 채 연한 연둣빛으로 모두가 빛을 발산한다. 봄의 온도를 받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똑같은 시기에 연둣빛으로 수만 송이의 쌍둥이로 태어난다. 연하디연한 연둣빛 싹으로 태어나, 너나 할 것 없이 짙푸른 커다란 잎을 향해 서로 앞다퉈 자연의 영양분을 힘껏 받아들인다.

봄은 봄을 보는 내 눈 안에 서서히 낯익어가고, 이제 제법 숲속을 진한 연둣빛으로 가득 메운다. 드문드문 기다랗고 검은 막대기가 나뭇잎의 원조임을 알릴뿐 온통 숲속을 빼곡히 연두 잎으로 채운다. 성질 급한 어떤 잎은 그새 자라 축 쳐져 있기도 하고, 어떤 잎은 아직도 자라지 못해 처음 그대로 작게 어미에 매달려 있고 또 어떤 잎은 하늘을 향해 힘껏 뻗어있는가 하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 뒹구는 신세가 된 잎도 있다.

산뜻함을 가장한 봄은 이렇게 자연을 초록으로 몰들이며 숲속을 점령하고 있다. 그 어디선가 딱따구리는 봄을 반기는 듯 낡은 껍질을 벗겨내려 딱딱 소리를 내고, 그 소리에 맞추어 작은 새들은 춤추며 날갯짓으로 화답한다. 어미 새는 이때다 싶은지 부지런히 봄 벌레를 물어다 작은 둥지로 날아든다. 작은 숲속이 색과 소리와 성장으로 조용하지만, 소란스럽게 봄을 피워내고 있다.

밤새 봄비가 소리 없이 여린 나뭇잎을 적셨나보다. 코끝으로 스치는 단내를 따라가보니 아카시아 나무에 하얀 꽃이 피어있고, 물기를 머금은 잎들은 서로 반짝이며 앞 다퉈 푸르름을 펄럭이고 있다. 각자 손톱만큼 컸을 텐데 숲속은 온통 영롱함으로 가득 차 어서 이 봄 길을 걸으라 재촉한다. 걸음마다 쑥쑥 커가는 봄의 소리가 더 깊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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