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나는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나이 차이도 있어서 내가 아직 책가방 메고 코흘리개용 손수건을 붙이고 다닐 때, 바로 위는 사춘기 고등학생, 맨 위는 무려 군인아저씨였다. 막내에게 세상은 쓰다. 아무리 아는 척을 해봤자 부+모+형제 일동은 “니까짓 꼬맹이가 뭘 안다고…” 하며 무시했다. 뭐 그렇다고 내가 어린 세월을 핍박 속에서만 지낸 건 아니다. 학교수업에 이어 과외공부까지 마치고 나와 보면 캄캄해진 길 밖에서 기다리던 오빠는 “우리 막내 힘들지?”하면서 나를 업고 전봇대 가로등 길을 헤아려 따스한 집으로 데리고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어린 내가 생사기로에서 응급실로 실려 갈 때, 아직 중학생이던 언니는 눈이 붓도록 울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막내를 살려주신다면 내가 죽어도 좋아요.”
요즘 패밀리 떼라피로 만나는 가족은 자녀가 다섯인데 막내가 마마, 파파 다음으로 난생 3번째 배운 말이 “My turn!”(내 차례야!)이라고 했다. 극성스런 형들이 지배하는 힘의 불균형 인생길에서 막내는 생존기술을 익혀가는 중이다.
남편도 막내 출신이다. 막내라고 다 같은 건 아니어서 이 철부지 막내는 자기보다 더 어린 동생에게 무엇을 빼앗겨보는 경험 없이 자란 덕에 세상이 마냥 즐겁다. 온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을 뿐 아니라 응석받이다운 면모를, 나를 만난 성인기까지 잘도 지켜왔다. 막내아들, 막내딸이 시시덕거리며 지금까지 살아오긴 했으나 한번 충돌하면 불꽃이 튀겼다. 각자의 핏줄에 새겨진 ‘막내적’ 고집 때문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뿔난 염소 두 마리. 네가 비켜! 싫어, 네가 먼저 비켜! 이솝우화의 실현인가. 아무튼 막내는 자기보다 힘세고 특권 있는 형제자매에 둘러싸여 열등감을 경험할 수 있으나 이로 인해 우월성 욕구가 커진다. 막내 출신 가운데 스포츠 선수가 많고 반항적, 혁명가적 기질도 함께 발달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막내, 둘째에 비해 첫째는 태어나자마자 남부러울 것 없는 위치를 누린다. 둘러봐도 경쟁자가 없다. 부모를 형제들과 나눠 갖지 않아도 된다. 부모는 흥분 속에 아기에게 좋다는 모든 걸 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태어나면서 첫아이의 인생은 극적 전환점을 맞는다. ‘열등감 연구’의 일인자 아들러박사는 이런 첫아이를 ‘폐위된 왕’으로 불렀다.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첫아이는 동생에게 어른들의 관심을 빼앗긴 채 스스로 적응하며 살아가야한다. 애정을 구하려 전전긍긍하던 모든 노력을 포기할 즈음, 혼자 생존해나가는 전략을 배우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공무원 같은 안정된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아들러 뿐 아니라 가족심리학 분야의 많은 연구들은 막내보다 맏이의 스트레스에 관심을 둔다. 맏이는 부모에게 첫 양육 경험인 까닭에 지나친 기대와 압력을 받기 쉽다. 맏이가 겪는 정서적 갈등이 둘째, 막내 등에 비해 훨씬 높으며 소아, 청소년 정신과 환자 가운데 맏이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둘째는 태어나보니 처음부터 세상이 불공평하다. 손위 형제보다 자기가 더 낫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스스로 짊어진 부담 속에 경쟁심 강하고 야망에 불타는 성격으로 자란다. 이들 가운데는 모험적 직업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은 대부분이 독자다. 경쟁해볼 형제가 없이 자란다. 언제나 내가 제일이다. 무엇을 나누어 가질 필요가 없다. ‘협동’이 부족한 대신, 어른을 조종하는 기술은 출중하다. 가족치료 선구자인 머레이 보웬 박사가 다시 살아나면(1990년 사망) 요즘 같은 독자 또는 무자녀 시대를 뭐라고 말할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