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욱(LA미주본사 경제부 차장)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2002년도 한국의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 카피다. 당시 후발 주자였던 이 기업은 이 광고 카피로 한국 소비자들의 감성을 파고 들면서 시장 점유율도 늘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 카피는 각 기업에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정년을 앞둔 세대들에게는 아직도 여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말로 호응이 대단했다.
나이가 든 사람끼리 야외라도 나가면 어김없이 듣고 부르는 노래가 있다. 바로 ‘내 나이가 어때서’다. 2012년 가수 오승근이 만든 이 노래의 가사 중 백미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이다. 60세, 70세가 넘어서 건강은 예전만 못하더라도 마음만은 청춘 그대로여서 사랑을 당연하게 누릴 수 있다는 선언적인 가사로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고령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사랑하기에 딱 좋다고 아무리 주장하더라도 운전면허 갱신에는 통하지 않는다.
올해 1월부터 캘리포니아주 차량등록국(DMV)는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에 대한 온라인 운전면허증 갱신 서비스를 종료하는 대신 직접 방문해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도록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은 운전면허 갱신시 필기 시험을 치르고 시력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고령 운전자들은 운전면허 갱신을 하기 위해 DMV를 방문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게 됐다. 다른 연령대 운전자들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필기 시험과 시력 검사를 유독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에게만 실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불만도 속출하고 있다. 수년 동안 사고도 없었고 벌점도 없는 무사고 무벌점 운전자들인데 고령이라는 이유로 DMV에 직접 가서 시험과 시력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에게만 필기 시험과 시력 검사를 실시하는 것은 나이에 의한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에게 직접 방문해 필기 시험과 시력 검사를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78년부터 실시해 온 제도인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실시를 잠시 유보했을 뿐이다. 이 유보 조치는 팬데믹이 가라 앉으며 일상 회복 조치 중 하나로 지난해 말로 만료됐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 신체적 변화가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젊은 시절에 비해 운전 중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고 전방 주시 능력도 떨어지면서 돌발 상황에 대한 반응 속도도 느려지게 마련이다. 특히 야간 운전은 고령 운전자들이 가급적 피하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3년 샌타모니카 파머스 마켓을 덮쳐 3세 여아를 포함해 모두 9명이 사망했던 자동차 사고의 운전자는 당시 86세였다. 이 사고로 고령 운전자들이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빚어졌다.
그렇다면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이 나이로 인한 신체적 변화로 교통 사고를 더 많이 내고 있는 것일까?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에 따르면 2018년 현재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의 교통 사고 발생률은 최근 들어 상승세를 보이고 있지만 운전면허 소지자 수와 운행 거리를 놓고 보면 교통 사망 사고 발생률은 1997년 정점을 찍은 뒤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가주 고속도로순찰대(CHP)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2019년 가주 내 70세 이상 운전면허 소지자의 수는 전체 운전면허 소지자 중 10.4%를 차지하고 있고 사망 사고율은 7.2%, 부상 사고율은 5.5%를 기록했다. 오히려 사망이나 부상을 일으킨 교통 사고 발생률이 높게 나타난 연령대는 20대였다. 20~24세 운전자는 전체 운전면허 소지자 중 8.1%를 차지하고 있는 데 사망 사고율은 11.9%, 부상 사고율은 12.5%로 나타났다. 25~29세 운전자의 경우 전체 운전면허 소지자 중 10%를 차지하고 있고 이들 연령대의 사망 사고율은 13.4%, 부상 사고율은 12.8%로 나타났다.
사망 사고율과 부상 사고율이라는 수치만을 놓고 보면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의 교통 사고 발생율은 20대 젊은층에 비해 낮은 수준으로 ‘나이=교통 사고’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이 운전면허의 방문 갱신 제도가 편견과 차별이라는 주장을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DMV는 젊은층이 고령층에 비해 운전 횟수와 운행 거리가 더 많기 때문에 사고 발생률이 더 높게 나온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논란이 계속되는 이 시간에도 70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은 운전면허 갱신을 위해 DMV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