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목사
여가에 대한 관심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시절을 맞이했다. 창조의 환희와 노출된 유혹 앞에서 우리는 여가나 오락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하라와 하지말라”는 율법적 명령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더 이상 속박할 수 없는 오늘, 우리는 복음적 자유 안에서의 책임있는 여가 선용의 지혜를 제공해야 할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소위 세속적 여가와 오늘의 당연한 삶의 부분이 되어가고 있는 문화적 변천 속에서 세속적 여가와 영적 여가를 구분하는 흑백 논리는 이미 설득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여가는 무시해도 곤란하고 몰두해도 곤란한 필요악처럼 현대인의 생활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가를 통해서 우리는 정신적인 긴장에서 해방되어 기분의 신진대사를 경험하여 활력있는 문화 창조의 힘과 유모어를 얻는다. 여가를 과소평가해서는안된다. 여가란 웹스터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일상적 활동의 일시적 중지에서 오는 자유로운 시간”을 의미한다. 문화는 여가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 언론인도 있었다.
생각해 보라. 음악, 독서, 스포츠, 취미생활, 오락, 등산, 여행에 빠져버린 삶의 감각을. 성경도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긍정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달리기에 비유하지 않았는가? 엿새 동안 우주를 창조하시고 제칠일에 안식하신 하나님은 누구보다 쉼의 중요성을 맨 처음으로 인정하신 분이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 대한 안식에의 초청은 쉼에 대한 주님의 배려요, 은혜요 선물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천국은 곧 영원한 즐거움의 장소”라고. 시편기자는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16:11)라고 말하였다. 천국은 건강한 삶의 엔조이먼트로 충일한 나라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기독교인의 의식구조 속에는 즐기는 것은 죄라고 하는 금욕주의적 미혹의 영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단은 우리 마음 속에 모든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하나님의 상을 심기에 애써온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그러므로 여가 선용이 죄라는 관념부터버려야 하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가에 대한 몰두가 가져올 수 있는 도덕적 위기에도 충분히 대처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만일 여가가 나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는 일에 방해가 되어진다면 이 여가를 거절하는 용기도 함께 있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 6:12)라고 말하였다. 그 자체가 불순하지 않다고 해서 모든 여가 선용이 다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여가 선용을 계획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세 가지 원칙적인 질문을 사용하여 여가에 대한 참여를 결정하도록 충고하고 싶다.
첫째, 이 여가가 나를 지배해버릴 가능성이 있는가? 다시 말하면 나는 이 여가에서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가? 지배 성향이 있는 오락일수록 추천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둘째, 이 여가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간증에 해롭지 않은가? 누가 나를 발견해도 나는 떳떳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간증까지 상실하면서 이 오락에 나를 던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셋째, 이 여가 선용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나에게 유익이 있는가? 다시 말하면 최소한의 어떤 가치 부여가 가능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이다.
여가 선용을 게획하는 벗들에게 빌립보서 4장8절의 말씀을 선물로 드리고 싶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