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현대의 혼돈은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때문이다. 태초에 있었던 그 말씀이 20세기에는 그 모습을 찾기 힘들다. 커뮤니케이션이 없이는 인간은 인간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가정생활, 교회생활, 사회생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유형의 공동 생활에서 성공적인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커뮤니케이션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지 정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의미의 전달을 성취해야 한다. 정보의 홍수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진정한 뜻에서 커뮤니케이션이 부재한다는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젊은이들 앞에 있는 가장 큰 벽도 아마 이 커뮤니케이션의 벽일 것이다. 가정에서 오늘을 사는 젊은 이들은 그들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이 벽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스승과의 관계에서, 직장에서는 경영자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친구나 이성과의 관계에서 이 벽은 여리고의 벽처럼 견고하며 커뮤니케이션의 문은 굳게 닫혀져 있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이 없이는 젊은이 특유의 아이디어도, 상징도, 언어도, 개념도 모두 다 의미를 잃어 버린다. 그래서 오늘의 젊은이들은 고독하기만 하다. 만나도 만남이 없는 군중 속의 고독은 영원히 처방이 없는가?
태초때 말씀이 있었다(요한복음1:1) 성경은 말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요한복음1:14)고 말한다. 그 말씀이신 한 인격적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과 만나고 형제들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실로 커뮤니게이션 부채의 시대에서 신기하기만 한 그리스도인의 만남의 체험이었다. 옛날 선지자는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할 수 있느냐?”(아모스3:3)고 우리에게 물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만남의 공통분모로 우리 사이에 오신 것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얻었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받은 것이다. 인간 관계의 단절의 아픔을 가진 자마다 이 화해의 복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몸으로 고백할 수 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현대의 상처속에 파묻은 자욱마다 이 화해의 복음의 연고를 발라 싸매는 나이팅게일처럼 되는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위대한 커뮤니케이트를 소유한 사람마다 이 화해의 일터로 소명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응급 처치함 속에는 언어보다 더 큰 목소리의 비 언어가 비장되어 있어야 한다. 이 비언어는 사랑과 행동과 환경을 포함한 의미의 호흡이며 몸짓이다. 저마다 자기 말에 바쁘다. 왜 우리는 잠시 우리의 입술을 제어하고(잠언10:19). 상대방의 피곤한 눈동자를 바라볼 여유가 없는 것일까? 잠언기자는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언1*:13)고 하였다. 기술 문명의 시대에 가장 개발되지 않은 기술은 거뮤니케이션의 기슬이다.
베드로의 발을 씻기던 예수님의 손. 요한의 푸념을 받아주던 그의 가슴. 유다의 비난과 고발을 잠잠히 들으시던 그의 귀, 그는 얼마나 완벽한 커뮤니게이션의 모델이셨는가? 그리스도의 젊은이들은 그에게서 커뮤니케이션의 정신과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한 잔의 냉수를 이름모를 형제에게 건네는 친절의 몸짓을/ 더럽고 상처난 발을 내가 지닌 가장 깨끗한 수건으로 씻기는 훈련을/ 나를 책하는 친구의 권면을 예언의 음성을 듣고 있듯 들어주는 기술을/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13:10)고 지혜자는 말하지 않았는가? 요즘 정치도. 교회도. 사회도. 예전처럼 따스함이 없다.
대망의 2023년을 맞이하여 벌써 3월이 지나고 4월을 맞이하였지만 희망을 바라보기보다 절망과 실망스러움이 더 많다. 한 사람 아담이 가져온 사망이 한 사람 예수를 통하여 생명에 삼킨 바 되고 말지 않았는가?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맞이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신 한 사람의 따뜻한 체온, 부드러운 언어, 정성스러운 눈동자, 명랑한 악수, 그리고 우리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새 생명을 전달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우리의 세계는 새로운 희망이 다시 찾아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부활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