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샬럿에 사는 친구가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상자를 열어보니 공기 포장지로 꽁꽁 싸맨 유리병 속 생강 레몬차, 일회용 팩에 담긴 홍삼 뿌리, 손수 재배해 말린 비파 잎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곁에 사각 봉투 하나가 놓여 있다.
역시나, 글 한 줄 없이 선물만 보낼 친구가 아니다. “내가 직접 차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운아야.” 첫 문장을 읽자마자 그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유난히 작은 체구로 잰걸음 하며 부엌을 오갔을 모습, 식탁 의자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펜을 꾹꾹 눌러썼을 시간이 눈앞에 그려진다. 글을 쓰는 동안 그는 꽃이었다가, 나무였다가, 이내 달처럼 웃었으리라.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 얇은 종이 한 장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서는 결코 적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편지다. 비록 몇 글자 안 될지라도 전화기 너머의 긴 수다보다 훨씬 깊은 울림을 준다. 어디 그뿐인가. 쓰는 이의 생각과 읽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하나로 잇는 마법과도 같다.
예전에 한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텅 빈 집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낯익은 이름이 적힌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채터누가에 사는 친구가 내가 없는 사이 애틀랜타를 다녀간 모양이었다. 봉투 속에는 만년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사연이 들어있었다. ‘어머나!’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오랜만에 받아본 손 글씨였다.
“친구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가 사는 동네를 지나려니 발길이 멈춘다오. 여행에서 돌아올 날이 아직 여러 날 남아서, 오늘 나는 혼자 이 찻집에 앉아 그대 생각을 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소.”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여고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하늘빛 바탕에 흰 구름무늬가 있는 편지지, 그 위를 빼곡히 채운 그녀의 자잘한 일상들. 온몸을 바위처럼 짓누르던 여독도 잊은 채, 나는 선 자리에서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타국에서 보낸 긴 세월이 만든 거리감 탓일까, 한국 여행은 왠지 모를 헛헛함만 안겨주었다. 외진 길을 터벅터벅 혼자 걷는 심정으로 돌아온 내게, 친구가 남기고 간 글은 시든 마음에 물을 주는 단비였다. 행여 이 안도감과 혈관을 타고 흐르던 짜릿한 전율이 사라질세라, 나는 짐도 풀지 않은 채 답장을 써 내려갔다.
편지는 그리움이 차오를 때 터져 나오는 밀물이다. 지난날의 기억이 현재의 마음에 겹쳐질 때 비로소 펜을 들게 된다. 바람이 휙 스치던 가을날, 장대비 속을 맹렬히 뛰던 여름, 그리고 첫눈 내리던 겨울. 과거 어느 시점, 누군가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불현듯 튀어나와 아련한 후회를 남길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글을 쓰고 싶어진다.
십칠 년 전 항암 치료를 받을 때도 그랬다. ‘힘내!’라는 글씨 옆에 하트가 그려진 노란 포스트잇 한 장. 고통 속에서 받은 쪽지는 그 어떤 진통제보다 강력했다. 세월의 틈새로 스며든 위기 속에서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어 몸과 마음이 축 늘어졌을 때, 빳빳하게 풀기를 먹여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종이 한 장의 힘이었다.
SNS에 길들여진 탓일까, 오랜만에 펜을 잡으려니 쑥스럽다. 그래도 오늘 밤엔 친구에게 꼭 답장을 쓰려 한다. 데면데면한 성격 탓에, 말하지 않아도 알겠거니 하며 두루뭉쑬 뭉개두었던 내 마음을 진하게 풀어놓고 싶다. 투명한 유리잔 속에서 제 무게를 버리고 둥둥 떠오르는 비파 찻잎처럼,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고 추억을 떠올리며 멋들어진 편지 한 통을 완성하리라.
아,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이미 충만해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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