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첫광고
김성희 부동산
이규 레스토랑

[수필] 편지 한 장의 미학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12-01 09:29:25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편지 한 장의 미학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샬럿에 사는 친구가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상자를 열어보니 공기 포장지로 꽁꽁 싸맨 유리병 속 생강 레몬차, 일회용 팩에 담긴 홍삼 뿌리, 손수 재배해 말린 비파 잎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곁에 사각 봉투 하나가 놓여 있다.

 

역시나, 글 한 줄 없이 선물만 보낼 친구가 아니다. “내가 직접 차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운아야.” 첫 문장을 읽자마자 그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유난히 작은 체구로 잰걸음 하며 부엌을 오갔을 모습, 식탁 의자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펜을 꾹꾹 눌러썼을 시간이 눈앞에 그려진다. 글을 쓰는 동안 그는 꽃이었다가, 나무였다가, 이내 달처럼 웃었으리라.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 얇은 종이 한 장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서는 결코 적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편지다. 비록 몇 글자 안 될지라도 전화기 너머의 긴 수다보다 훨씬 깊은 울림을 준다. 어디 그뿐인가. 쓰는 이의 생각과 읽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하나로 잇는 마법과도 같다.

 

예전에 한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텅 빈 집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낯익은 이름이 적힌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채터누가에 사는 친구가 내가 없는 사이 애틀랜타를 다녀간 모양이었다. 봉투 속에는 만년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사연이 들어있었다. ‘어머나!’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오랜만에 받아본 손 글씨였다.

 

“친구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가 사는 동네를 지나려니 발길이 멈춘다오. 여행에서 돌아올 날이 아직 여러 날 남아서, 오늘 나는 혼자 이 찻집에 앉아 그대 생각을 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소.”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여고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하늘빛 바탕에 흰 구름무늬가 있는 편지지, 그 위를 빼곡히 채운 그녀의 자잘한 일상들. 온몸을 바위처럼 짓누르던 여독도 잊은 채, 나는 선 자리에서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타국에서 보낸 긴 세월이 만든 거리감 탓일까, 한국 여행은 왠지 모를 헛헛함만 안겨주었다. 외진 길을 터벅터벅 혼자 걷는 심정으로 돌아온 내게, 친구가 남기고 간 글은 시든 마음에 물을 주는 단비였다. 행여 이 안도감과 혈관을 타고 흐르던 짜릿한 전율이 사라질세라, 나는 짐도 풀지 않은 채 답장을 써 내려갔다.

 

편지는 그리움이 차오를 때 터져 나오는 밀물이다. 지난날의 기억이 현재의 마음에 겹쳐질 때 비로소 펜을 들게 된다. 바람이 휙 스치던 가을날, 장대비 속을 맹렬히 뛰던 여름, 그리고 첫눈 내리던 겨울. 과거 어느 시점, 누군가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불현듯 튀어나와 아련한 후회를 남길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글을 쓰고 싶어진다.

 

십칠 년 전 항암 치료를 받을 때도 그랬다. ‘힘내!’라는 글씨 옆에 하트가 그려진 노란 포스트잇 한 장. 고통 속에서 받은 쪽지는 그 어떤 진통제보다 강력했다. 세월의 틈새로 스며든 위기 속에서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어 몸과 마음이 축 늘어졌을 때, 빳빳하게 풀기를 먹여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종이 한 장의 힘이었다.

 

SNS에 길들여진 탓일까, 오랜만에 펜을 잡으려니 쑥스럽다. 그래도 오늘 밤엔 친구에게 꼭 답장을 쓰려 한다. 데면데면한 성격 탓에, 말하지 않아도 알겠거니 하며 두루뭉쑬 뭉개두었던 내 마음을 진하게 풀어놓고 싶다. 투명한 유리잔 속에서 제 무게를 버리고 둥둥 떠오르는 비파 찻잎처럼,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고 추억을 떠올리며 멋들어진 편지 한 통을 완성하리라.

 

아,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이미 충만해지는 저녁이다.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디아스포라 삶의 소망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디아스포라 삶의 소망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이민자(디아스포라)의 소망은 안정된 삶을 이루는 것이다.삶의 토대가 흔들리는 극한 상황에서 미래 지향적인 소망의 실현이 가능할까?이민자의 삶이

[삶과 생각] 친구의 9순 잔치
[삶과 생각] 친구의 9순 잔치

지천(支泉)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 오혜영 씨의 구순 잔치가 많은 지인들의 축하와 함께 아름답게 펼쳐졌다.축하와 함께 지난날들을 돌이켜 본다. 나는

[추억의 아름다운 시] 님의 노래

김소월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

[수필] 슬픔의 에너지
[수필] 슬픔의 에너지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여든 네 살 할머니가 스스로 양로원을 찾았다. 남은 생을 먼저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덧없이 흘려보내지는 않겠다는 할머니만의 결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주택보험 구조 이해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주택보험 구조 이해

최선호 보험전문인  어떤 책이든 맨 앞의 목차를 훑어보면 전체 윤곽이 보인다. 세부 내용을 모두 읽지 않아도, 어떤 순서로 무엇이 담겨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주택보험도 마찬

[애틀랜타 칼럼] 바르게 보는 법을 배우자

눈은 마음의 창이기에 사물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정신적 근시와 원시를 경계하고 창조적인 시각을 가져야 하며, 미키모토 고기치의 인공 진주 양식 성공 사례처럼 지식을 행동과 결합해 기회를 포착하는 적극성이 성공의 필수 요건임을 역설한다.

[내 마음의 시] 연분홍 설레임
[내 마음의 시] 연분홍 설레임

광우 허 영희(애틀란타 문학회 회원) 다시 피는 봄,겨울 내내 소중히 품어온 고운 마음살며시 봄바람이 부추기면그 속에 피어난 연분홍 설레임 고이 접어둔 남빛 저고리 꺼내어연분홍 치

[박영권의 CPA코너] 한국 은행 계좌도 신고 대상… 놓치면 안 된다
[박영권의 CPA코너] 한국 은행 계좌도 신고 대상… 놓치면 안 된다

이민 생활을 하는 한인 동포들은 한국이나 해외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단순히 계좌를 보유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해외 금융계좌와 금융자산

[법률칼럼] 밀입국 배우자 영주권, 2026년 변수까지 고려해야 한다

2026년 현재 밀입국 배우자의 영주권 취득은 법적 조항보다 심사 강도 강화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엄격한 검증 기조에 맞춰 I-601A 사전면제 신청 시 극심한 곤란(Extreme Hardship)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 확보가 중요하다. 무분별한 절차 진행보다는 FOIA 기록 확인 등 사전 점검이 선행되어야 한다.

[행복한 아침] 속도 시대와 노년 세대의 느림 비교

김 정자(시인 수필가)   노년 세대를 이야기 할 때면 자연스럽게 모든 일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본인의 의지이든 아니든 노년이라는 시기에는 어쩔 수 없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