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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피론의 돼지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5-26 10:07:23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피론의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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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행복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직업상 한정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노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경험하기 때문인 듯하다. 덕분에 내가 추구하던 행복의 가치나 기준도 많이 바뀌었다. 지위의 높고 낮음, 명예나 물질의 유무 같은 것들은 이제 내 행복의 채점 기준표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여전히 지갑이 두둑할 때 입 꼬리가 먼저 승천하는 평범한 속물이기도 하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죽는 것보다 월등히 나은 상태"라고 말했다. 백번 맞는 말이다. 인생을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으로 본다면, 아무리 고단한 삶이라도 죽는 것보다는 살아 숨 쉬는 게 남는 장사다. 사실 매일 아침 눈을 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경이로운 일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행복의 기본 배당금은 받고 시작하는 셈이다.

 

행복은 늘 현재 진행형으로만 존재한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살다가도, 문득 "저 고개만 넘으면 행복해질 거야"라고 믿는 순간 지금 누려야 할 일상은 불행의 대기실로 입장하고 만다. 마음에 심술궂은 '쾌락 적응' 장치가 붙어 있는 탓에, 간신히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도 기쁨은 잠시다. 처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감격도 며칠만 지나면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다. 이 얄팍한 변덕의 굴레에서 행복을 더 오래 붙잡아둘 비결은 정말 없는 걸까?

 

그리스의 회의주의 철학자 피론이 탄 배의 이야기, 일명 '피론의 돼지' 스토리가 떠오른다. 어느 날 피론이 배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집채만 한 파도가 몰아치는 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배가 사정없이 기우뚱거리자 승객들은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고, 살려달라고 악을 쓰며 우왕좌왕하느라 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철학자이든 부자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다가올 죽음의 공포에 질려 지옥을 맛보고 있던 그 순간, 선실 구석에서 홀로 완벽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던 승객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내일 아침 메뉴가 무엇일지만 궁금해 하던 '돼지'였다. 돼지는 폭풍우가 치든 배가 뒤집히려 하든 상관없이 평소처럼 느긋하게 사료를 씹으며 평온한 눈빛으로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닥쳐올 죽음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완벽히 밀착해 있는 존재.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태연할 수 있는 그 비범한 능력을 보며 철학자 피론은 탄식했다. "인간이 이성으로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바로 저 돼지의 마음 상태다!"

 

가끔 그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예상보다 훨씬 싱거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거창한 성취의 탑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의 미련을 잠시 내려놓은 그 틈새에서 슬그머니 피어나는 법이니까. 역설적이게도 내가 "나 반드시 행복해지고 말 거야!"라며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때 행복은 가장 빠르게 도망쳤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자체가 이미 내 안의 결핍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인생이란 행복과 불행이 손등과 손바닥처럼 붙어 다니며 늘 공존한다. 온전히 행복하기만 한 삶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하기만 한 삶도 없다. 그러니 폭풍우가 치는 배 위에서 내가 먼저 질려 절망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그저 오늘 나에게 주어진 곤경조차 인생의 한 배경음악으로 담담히 받아들이고,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작은 것들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찌 보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아주 간단할 수도 있겠다. 가끔 삶이 나를 거칠게 흔들 때는, 폭풍우 치는 선실 구석에서 평온하게 사료를 씹던 그 의연한 돼지를 떠올려보려 한다. 행복은 붙잡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그저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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