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첫광고
이규 레스토랑
김성희 부동산

[삶과 생각] ‘샛문’의 여유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3-01-31 12:57:39

삶과 생각, 손용상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손용상(소설가)

 

내가 어렸을 때 시골집에는 대문이 있어도 집 뒤쪽이나 중간 담 모퉁이에 작은 쪽문이 있는 집들이 많았다. 이 샛문은 대소가 친척들을 방문할 때 꼬부랑 고샅을 돌고 돌아 출입하기보다는 지름길 역할을 하였고, 또한 밤 이슥할 때 누나들이나 어머니가 동네 마실을 가거나 화투놀이 방에 갈 때, 그러니까 어른들 몰래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옛날 어른들은 아마 이를 알면서도 눈감아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여유이고 아량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릴 때의 일이다. 황금물결의 가을 들녘은 추수가 끝나자 삭막하였지만, 넓은 마당은 다니기도 어려울 만큼 나락 낟가리 뭉치들로 가득했었다. 하늘 높이 쌓아놓은 낟가리들은 어린 우리들이 보기에도 흐뭇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신나게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늦가을 어느 날, 타작을 하여 나락을 마당에 쌓아놓고 가마니로 덮어놓았다. 다음날 아침 어수선한 소리에 나가보았더니 때까우(거위) 한 마리가 목이 잘린 채 대문 앞에 죽어있었다. 원래 암놈은 목소리가 크고 맑아 소리를 쳐서 엄포를 놓거나 주인에게 구호 요청을 하고, 수놈은 허스키 목소리를 꽥꽥 소리를 지르며 목을 길게 빼고 날개를 치면서 덤벼들어 물어뜯는 고약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웬만한 개보다도 사나워 집 지키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그날 밤 도둑이 든 것이었다.  

그날 밤은 초겨울 날씨로 바람이 심하게 불고 몹시 추웠다. 싸락눈이 내려 발자국이 눈 위에 선연하게 나타나있었다. 화가 난 할아버지가 집안 머슴을 데리고 발자국을 추적했다. 나도 뒤를 따라 강아지 마냥 종종걸음으로 쫓아갔다. 발자국은 고샅을 지나 맨 꼭대기 오두막집으로 이어져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되돌아서 발자국을 지우며 오시는 것이었다. 

평소 할아버지는 호랑이같이 무섭고 급한 성격이라 당장 문을 차고 들어가 도둑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내어 눈밭에 팽개치거나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멍석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뒷짐을 지고 돌아오시며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런 짓을 했을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린 소견이지만 여름 내내 불볕더위 속에서 땀 흘리며 농사지어 탈곡해놓은 나락을 훔쳐간 도둑을 당장 요절이라도 냈어야 평소 할아버지의 위엄이 설 것 같았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그것이 마음의 여유이고 지혜라는 것을. 훗날 그때 나락을 훔쳐갔던 사람은 그날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바로 와서 용서를 구했다. 그리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평생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어떤 궂은일도 마다 않고 해냈다.  

할아버지께서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세상일은 꼭 생각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치나 원칙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단다. 남의 사소한 실수 같은 것을 덮어주지 못하고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사람을 비난할 때도 상대방이 변명할 수 없도록 무조건 공격하는 것은 좋지 않아. 상대방이 달아날 구멍을 조금 남겨놓아야 한다”고. 우리 일상생활에도 이런 동네 마을의 샛문과 같은 소통 길이 있어야한다는 말씀이었다. 마치 동양화에서 여백을 남기듯이. 알다시피 동양화에서의 여백은 무한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여백은 보는 이의 몫으로 구름, 새, 꽃, 나아가서 보이지 않는 바람까지도 그려 넣을 수 있는 여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을 살며너무 똑 부러지게 FM대로보다는좀 여유를 갖고 살자. 아내가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와 미처 못 채운 와이셔츠 단추도 채워 줄 수 있도록 빈틈을 남겨 놓는 것…그 또한 여유가 아닐까 생각을 가져본다.

[삶과 생각] ‘샛문’의 여유
손용상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추억의 아름다운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수필〉우리에게 불행해질 권리는 없다
〈수필〉우리에게 불행해질 권리는 없다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삶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암'이라는 날 선 선고를 받던 그날, 나는 텅 빈 머릿속을 떠다니던 죽음의 공포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65세 미만 장애로 메디케어에 들어간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들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65세 미만 장애로 메디케어에 들어간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들

최선호 보험전문인  메디케어는 보통 65세가 되면 가입하는 연방 건강보험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65세 미만이라도 장애(Disability) 판정을 받고 SSDI(Social

[허니웨이 건강 칼럼] 프로폴리스편 3회- “아이도 괜찮을까요?”
[허니웨이 건강 칼럼] 프로폴리스편 3회- “아이도 괜찮을까요?”

온 가족이 함께하는 프로폴리스 사용법 프로폴리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아이도 먹어도 되나요?”입니다.가족 모두가 건강을 챙기고 싶은 마음,그 마

[애틀랜타 칼럼] 건전한 불만은 세상을 이끄는 힘

이용희 목사 우리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한 그 일에서 만족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연스럽게 일에 적응하고 자신의 인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만족이란 자신

[내 마음의 시] 영수는 눈먼 영희를
[내 마음의 시] 영수는 눈먼 영희를

월우 장붕익(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비밀 언덕으로어깨를 기대며서로 힘을 얻는다 버팀목으로묵묵히 견디어 낸다 대들보로세월의 무게에도휘어지지 않는다 뼈대있는 가문으로가족을 지킨다 앞

[빛의 가장자리] 얼음위의 고양이들

갑작스러운 한파로 얼어붙은 뒷마당에서 저자는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며 그들의 고단한 삶을 지켜본다. 따뜻한 집 안에서 보호받는 반려견과 대비되는 들고양이들의 처지를 통해 생존의 엄숙함과 생명에 대한 연민을 전하며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희망을 담았다.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이민자 삶의 역경을 이기는 힘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이민자 삶의 역경을 이기는 힘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지금 이민자 삶이 위기에 처한 그 어느 때보다 대처하기 힘든 상황이 아닌가 싶다.한겨울의 바람 부는 황량한 벌판에 망연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

[행복한 아침]  진위 여부, 거짓과 진실

김 정자(시인 수필가)   무슨 일이든 양쪽 말은 다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사실 여부를 부풀려서 궁지로 몰아 넣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 저들의 전례 없는 말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이민자 삶의 역경을 이기는 힘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이민자 삶의 역경을 이기는 힘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지금 이민자 삶이 위기에 처한 그 어느 때보다 대처하기 힘든 상황이 아닌가 싶다.한겨울의 바람 부는 황량한 벌판에 망연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