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이규 레스토랑
첫광고
엘리트 학원

[행복한 아침] 버킷 리스트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2-12-16 08:10:07

행복한 아침, 김정자(시인·수필가)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누가 스킨 케어

김정자(시인·수필가)                    

 

묵은 해가 저물어가고 새해가 다가오는 길목에서 문득 여러 해 전에 써 두었던 버킷 리스트가 떠올랐다. 은퇴를 기다리며 기록해 두었던 리스트를 열어본다. 미 대륙 횡단은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다. 

구비구비 만나지는 풍광이며 색다른 감성 유추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까지. 거대한 ‘대륙횡단’이란 계획 수립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안내 책자와 전문 서적들을 탐독하고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할 무렵, 뜬금없는 팬데믹 출몰로 언제 쯤엔 떠날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맡기기로 하고 상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 만으로 만족 하기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매일 다른 곳을 찾아다니며 구상해 놓은 낯선 행선지를 따라 날마다 다른 곳을 찾아나서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으려나,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체력도 의욕도 뒷걸음질 치게 되자, 기차를 타고 대륙 횡단을 해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 같다는 생각에 리스트가 수정되기 시작했다. 

묘한 대안이 한 몫 끼어들었다. 한국 방문을 기화로 방방곡곡 두루두루 여행을 하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주변  동남아 여행도 곁들이면 어떠하리 갈수록 가관이 진행된다. 벌써 세 번째 수정 작업 수순을 밟게 된다. 

은퇴와 더불어 동남아 태국 선교 계획이 먼저였었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비포장 도로를 따라 한나절을 가야 닿을 수 있는 산골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이 우선 순위였었는데 나이가 걸림돌이 된다는 선교 기관 통보를 받게 되면서 좌절을 겪게 되었다. 선교 현장에서는 체력이 먼저였다는 깨달음이 지금껏 자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누가 부추긴 것도 아닌데 스스로 빈틈없이 살아내야 한다는 명제에 뒤쫓김 당하듯 살아온 흔적보다 여백으로 남겨질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면서 그 동안 꿈꾸어 왔던 것, 꼭 하고 싶었던 목록을 기록해 보곤 했었다. 여하한 설명도, 이해도 필요치 않은 살아본 인생이기에 그 본질에서 진액을 추출해 내는 작업으로 격상시키기로 했다. 

여백이란 다 써버리고 남은 자투리가 아니라 다 내려놓고, 비워낸 담백하고 깨끗한 힘이 있다. 세상을 읽어내는 새로운 고안과 대안을 구사하는 가능성을 자각하게 해준다. 초감각적 예견을 눈뜨임하게 해줄 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려내지 못했던 새로운 화폭 구상을 구현해내기도 한다. 애타게 보고팠던 것들, 만나보고 들어보고 만져보며 지치도록 여백을 채워보고 싶은 꿈이 애드벌룬 마냥 두둥실이다.

버킷 리스트 작성에 몰두하다 보면 막상 여행을 떠날 때 보다 이것 저것 준비하고 찾아보고 계획하는 재미가 더 값진 것 마냥 리스트를 작성하는 재미 또한 흐뭇하고 흡족하다. 산다는 일이, 남은 날이 더 짧은 여백을 그려내는 일이 버겁다고 느껴지면서 작성을 끝낸 리스트를 살펴보며 지우기도 하고 다듬어내는 일에 집중하게 되는 자신을 보면서 아직 삶의 여백에 대한 잠재된 열망이 남아 있었나 보다 싶다. 아직은 남은 날들이 기다려줄 것이라는 느긋함으로 미루어 놓았던 것들, 해보고 싶은 것들을 기록해 두었던 것인데 두어 차례 수정을 그치는 동안 남은 날들이 어느 덧 줄어들기도 했거니와 문득 적어놓은 것들을 빠짐없이 이루고 나면 행복이 부피가 어느 만큼 부풀어 오를까 싶기도 하다.

버킷 리스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 때문에 행복해 하는 모습이 자화상으로 고정되어질까. 리스트 진행이 멈추는 날이 되면, 하고 싶었던 것들이 정리 요약되고 인생이 정리되는 직감 같은 종잡을 수 없는 막연한 회의가 반응할 것 같다. 리스트 작성이 시작될 무렵엔 남은 여정 길이에는 염두도 없었는데 리스트가 수정될 때마다 활기찼던 꿈들이 퇴색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리스트 최종 수정본에는 인생 끝자락에서 떠오르는 난해한 질문들만 옹기종기 정답게 모여 있음을 보게 될 것 같다.

세월에 실려 흘러간 과거는 더 이상 지금이 아니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서 마주 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현재이다. 과거도 미래도 기억과 희망의 구실일 뿐 소임이나 역할은 없었던 것 같다. 남은 여정을, 남은 날들을 구상하는 작업을 공간적인 것이라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일은 겸허한 몸 가짐의 비롯이다. 해서 지금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소중함에 주목할 때임을 분별하면서 갸륵하고 아름다운 늙음의 진가를 새롭듯 다듬어 가자고 스스로를 부추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마지막이나 파행이 아닌 순환이기에 소망으로 미래를 불러들이려 한다. 남겨진 낡은 추억들을 비워내며 빈 마음에 푸른 겨울 하늘에 가득한 푸름의 맥을 소복소복 채워가며 최종 수정본 버킷 리스트로 삼기로 했다. 리스트를 작성하며 꿈꾸는 동안의 행복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질 것이라서.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법률칼럼] 추방 작전 준비 완료

케빈 김 법무사  2025년 1월 20일 출범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 이민자 추방 작전을 본격적으로 실행할 준비를 마쳤다. 톰 호먼(Tom Homa

[벌레박사 칼럼] 터마이트 관리 얼마만에 해야 하나?

요즘 들어 타주에서 이사 온 고객들로부터 터마이트 관리에 대한 문의전화가 많이 오고 있다. 타주에서는 터마이트 관리를 안 했는데, 조지아는 터마이트가 많아서 관리를 해야 한다는 이

[행복한 아침] 세월 속에서 만난 새해

김정자(시인·수필가)     지난 해 연말과 새해 연시를 기해 다사다난한 일들로 얼룩졌다. 미국 39대 대통령을 역임하신 지미 카터 전 대통령께서 12월 29일 향연 100세로 별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새로움의 초대

최 모세(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새해의 밝은 햇살이 가득한 아침이다. 연휴에 분주하게 지내느라 새로움을 마주하는 희망찬 의지를 다질 새도 없었다. 새해부터 경건해야 할 삶의 질서

[신앙칼럼] 명품인생, 명품신앙(Luxury Life, Luxury Faith, 로마서Romans 12:2)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지금 조금 힘쓰면 영혼이 큰 평화와 영원한 기쁨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인생을 <명품인생(Luxury Life)>이라 과감하

[리 혹스테이더 칼럼] 벼랑 끝에 선 유럽
[리 혹스테이더 칼럼] 벼랑 끝에 선 유럽

유럽은 산적한 위협의 한 복판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기존의 전통적인 정당들이 유권자들의 들끓는 분노 속에 침몰했다. 경제는 둔화세를 보이거나 기껏해야 답보상태

[오늘과 내일]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가짐

작년 12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떼면서 지난 1년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순간에 우리는 질문해 본다. 지난 한해 동안 행복하셨습니까? 후회되고 아쉬웠던 일은 없

[정숙희의 시선] 타마라 드 렘피카 @ 드영 뮤지엄
[정숙희의 시선] 타마라 드 렘피카 @ 드영 뮤지엄

굉장히 낯선 이름의 이 화가는 100년 전 유럽과 미국의 화단을 매혹했던 경이로운 여성이다.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이자 파격의 아이콘이며 사교계의 총아이기도 했던 그녀는 남자와 여

[에세이] 묵사발의 맛

꽃동네에서 먹은 묵사발은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처음 꽃동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수녀님들이 꽃을 많이 가꾸며 가는 동네일 것이라는 상상을 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라는

[시와 수필] 하늘 아래 사람임이 부끄러운 시대여

박경자(전 숙명여대 미주총동문회장)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