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미국에 이민을 오면서부터 미식 축구 선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는 미식 축구를 TV로 관람을 하는데 어떤 선수가 골을 집어 넣으려고 막 달려가다가 그만 골대 앞에서 딱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미끄러진 것입니다. 그때 저는 다 이긴 경기를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아이. 저런 바보’하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어머. 저 사람 다치지는 않았나”하며 그 사람의 안전을 걱정했습니다. 저는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문제에 먼저 관심을 쏟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남자와 여자는 사물을 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것보다 주관적인 감정 즉 운동선수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앞서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들의 또 다른 특징은 목적 지향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목적보다도 관계 지향적입니다.
저는 정말 내키지 않지만 종종 마트에 따라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트에서 아내가 이것 저것 만지면서 좋은 물건을 고를 때, 이것을 보고 기다리는 저는 지겨워서 아무거나 사가지고 빨리 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과 함께 이것 저것 보면서 시간을 보내길 원합니다. 어떤 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성들이 하루에 사용하는 단어가 2만5천 단어라고 합니다. 반면 남성들은 하루에 만 단어 정도입니다. 그러나 절반도 안 되는 셈입니다. 이런 특성은 어렸을 때부터 나타납니다. 유치원 아이들 중 여아들은 거의 100% 가까이 발음이 정확합니다. 그러나 남자 아이들은 70% 정도만 정확하고 나머지 30%는 상대방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어른이 되어서도 남습니다. 아내가 뭐라고 하면 “알았어…” 하며 얼버무리고 마는 습관이 남성들에게는 있습니다. 이 외에도 남자들은 개념적인 반면 여성들은 세부적이라는 특성을 갖습니다.
이따금씩 제가 영화나 음악회를 TV를 통해 보면 아내는 꼭 물어봅니다. 시청 소감을…. 그러면 저는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응 재미있어” 아내는 좀 더 구체적인 시청 소감을 듣기를 원하는데 난 그저 형식적인 대답만 합니다. 이처럼 남편과 아내는 다른 게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같은 게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피차에 다른 존재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대화가 유지 됩니다. 그런데 대화를 할 때 한 가지 명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고 배우자의 말을 경청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약1:19)고 했습니다. 또한 제노라는 유명한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창조주는 왜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를 주셨는가? 그것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갑절로 하라는 창조주의 계획 하심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듣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성들도 듣는 연습을 많이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교적 남성 보다는 여성들이 더 많은 말을 하는 편인데 듣는 데서도 많이 들어 주어야 올바른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너무 적게 말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인생에는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리학적인 건강은 감정 표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말로 느낌을 표현할 수 있어야 생리학적으로 건강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려면 여성들은 하루에 40-50분 이상 또는 한 시간 정도의 대화를 필요로 하고 남성들은 15분 내지 20분 정도를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남성들은 한 5분 정도 밖에는 의미있는 대화를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때 의미있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잊고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대화의 원리는 너무 빨리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