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흐린 일기에 저녁 무렵엔 비까지 내린 한가위였다. 이틀을 기다린 끝에 조금은 기운 듯 하지만 완만하게 채워진 보름달을 만났다. 올해 한가위 보름달은 어느 때보다 특별하다.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든, 100년 만에 가장 둥긂이 완전한 추석 보름달이 떠오를 것이란 예보가 있었다. 둥근 보름달이 우리네 시야에 들어오기 까지는, 해와 지구, 달이 일직선을 이루게 될 때 보름달이 되는 것인데 달이 지구를 회전하는 궤도가 타원으로 돌기 때문에 꽉 채워지는 보름달이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 날짜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명절에 온전한 보름달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틀을 기다린 보람으로 한가위 만큼은 아니지만 보름달이 풍성하게 채워졌다. 잦은 비로 혹여 보름달을 보지 못하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였지만 달빛이 쏟아지고 있는 정경이 반갑고 감미롭다.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둥근 달님이 도심의 길들을 비추어 주고 있는 야경이 생경 스럽다.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는 백로를 지나면서 하늘도 가을 빛이 완연해진 중추계절이다. 가장 달빛이 좋다는 추석을 이틀이나 지나긴 했지만 멋진 달밤을 연출해 줄 것을 기대하며 우리집 할배랑 정원 벤치에서 달맞이를 하기로 했다. 휘영하니 밝은 보름달이 신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넘실대는 빛결이 쏟아지고 있는 정경이 감미롭다. 달빛이 건네주는 온화한 분위기 만으로도 이미 마음 산책은 모자람 없이 넉넉함으로 즐길 수 있을 만큼 군데군데 흩어진 구름 사이로 요요한 달빛이 쏟아져 내린다. 달님으로부터 드리워지고 있는 빛줄기가 별빛과 어우러지며 완벽한 짜임새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어 번잡한 세상 시름 잠시 놓아두고 달님을 동무삼아 그리움 사무친 이름들을 불러볼 참이다.
휘영청 달빛이 고요로움을 불러들이고 천지는 그윽하다. 달빛은 당황할 만큼 농도 짙은 색상도 아니요 흐릿한 미광도 아닌, 눈부실 만큼 강렬한 빛을 뿜어내지도 않아서 온화하고 해맑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단순한 듯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다정다감한 달빛이 교교하다. 달 주위에 흐르는 구름이 유려한 학 같기도 하고 바람에 하늘대는 비단 옷자락으로 보이기도 한다. 소슬한 밤기운이 배경이 된 달의 빛결이 뽀얀 진주빛을 띠고 있다. 한가한 것 같으면서 결코 나태하지 않은, 방만한 것 같으면서도 산만하지 않은, 화려한 듯 하지만 우아함에는 집요해 보인다. 달빛이 구사해내고 있는 적요와 어울리는 맑은 밤이다. 더위를 밀어낸 계절 전령이 초대해준 밤하늘엔 달님이 산뜻하고 말쑥한, 아담한 듯 우아하면서 단아한 모습으로 중천으로 솟아 올랐다.
가고 싶은 대로 내달아 갈 수 없는 것이 달의 행로다. 달의 여정은 공전과 자전 주기를 따르고 있어 한치의 오차 없는 치밀한 주기가 요구된다. 일정한 기울기에 달이 차오르고 비워내는 모드까지 무미한 것 하나 없는 것이 달이 가는 길이다. 달이 떠오르는 것도 기우는 것도 새로이 준비된 몰입 없이도 클라이맥스를 연출하고 독특한 풍광을 능숙하게 운용해내고 있다.
밝고 환한 빛 줄기가 여울지는 무량한 달빛을 받으며 달님을 바라보는 동안 넉넉한 평안이 밀려들면서 문득 유년의 동무들이 떠오른다. 자꾸만 따라오는 달님을 따돌리느라 흥건히 땀이 베었던 유년의 그리움을 옛 동무들이랑 재현해보고 싶어진다. 달빛은 사색과 사유를 유도해내고 그리움까지 불러들인다. 달빛 아래 환하게 드러난 고향 신작로도 보이고, 둥근 달 같이 둥근 마음을 가지셨던 내 어머니 모습도 보인다. 달님은 귀향을 불러들이고 달빛은 지독한 망향의 그리움을 끌어들인다. 그리움 발원지는 달님이다. 달 빛에 낭자하게 젖어버린 벤치에서 나이든 노부부는 주름진 모습을 숨기고 싶지 않을 만큼 달빛에 젖은 채 오히려 삶의 훈장으로 받아 들이자고 서로를 다독인다. 달빛에 취한 노부부는 흘러가버린 세월을 돌아 보며 동행해온 여정의 마디 마디들을 어루만져 본다. 노부부 이야기를 엿들은 달님의 미소에서 오묘하고 알 수 없는 꽃 향기가 풍겨온다. 밤하늘이 토해내고 있는 심호흡이 깊은 울림이 되어 우주에, 태양계에, 지구별에, 북미 대륙에, 애틀랜타에 농밀한 파문을 일으키는데 환한 둥근 달 속엔 온 우주가 감추어져 있는 듯 하다. 달빛에 드러난 환한 도심거리는 분주함도 멈추고 고요로움으로 잘 정돈된 밤풍경을 연출해내고 있다. 밤이 깊었다. 달맞이를 접고 정원에서 현관으로 들어서는 동안 계속 달님이 따라온다. 달님은 여전히 빛 부신 빛살을 쏟아내고 있다. 마음이 한없이 유순해지고 솔직해진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들이 달 같이 둥글고 달빛 같이 부드러웠으면 좋으련만. 이방인의 삶이라 그런지 보름달 유정이 어찌 적적하고 쓸쓸한 기류가 미묘하게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