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지인들과 둘러앉아 커피 타임으로 어우러지는 자리에서였다. 한참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거침없이 등장해야 할 지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동년배들이라 ‘나도 그래’ 너도 나도 건망증 앞에서 난감했던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즈음엔 부쩍 주방에서 식사 준비가 시작되면 긴장감이 몰려온다는 일화도 등장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는 ‘뭘 꺼내려 했지?’ 떠오르지 않으면 얼른 냉장고 문을 닫고 심호흡을 한다고. 이 뿐 아니다. 전기 레인지에서 조리를 끝낸 후 전원 스위치 끄기를 깜박했던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다음부터 긴장감을 놓칠 수 없게 되었다고. 대화 중에도, 고유명사. 지명, 인명이 까무룩 떠오르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어제 일도 떠오르지 않는 지경이 반복 된단다. 완전 Me Too다.
혹여 ‘디지털 치매’는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쩌다 기억과 망각의 강가에서 서성이는 나이가 된 것일까. 숙연히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다독인다. 휴대폰, 컴퓨터 등 디지털기기 사용에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도 계산 능력도 확연히 떨어진데다 과다한 정보 습득으로 건망증 증세가 예전보다 두드러진 현상을 ‘디지털 치매’라 칭하는 말인데 신조어로 떠오를 만큼 광범위할 정도로 확산 되고 있다. 심지어 사진 기능처럼 기억하는 능력을 가질 수는 없을까 해서 ‘포토 그래픽 메모리’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과연 꼭 필요한 문명일까. 기억과 망각의 강은 인간이 외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여정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년의 시기에서는 그 시절 대로,. 여학교 시절에는 그 시점의 볼륨만큼 잊지 않아야 될 것들이 항시 있어왔다. 잊지 않아야 하는 일들이 기억과 망각의 강을 따라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한다고, 잊지 않으려 전력투구 해왔는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인지가 형성되려면 기억과 망각의 균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정서적 행복과 창의성의 추구를 위해서도 망각은 필수적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노화로 인한 건망증은 정상적인 망각의 지류로 당연시하며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오히려 일상의 일들을 잊지 못하고 모두 다 간직하고 있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살아가다 보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일들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삶의 길 위에서 우뚝 기다리고 있기도 하는 것이 인생 여정이 아니던가.
생각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능력이다, 생각을 저장하는 기억과 무시로 지우려는 망각이 과거와 현재의 삶을 이어가며 불가분의 이중주를 연주해가고 있다. 삶을 꾸려가기 위해 잊기를 해야 하는 것은 공간 기억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망각이 필요한 것이라 했다. 우리에게 망각이란 굳이 필요한 것일까. 잊지 않으려 메모도 하고 여러 번 되뇌어 보기도 하고 전력투구를 해왔지만 지각과 인식의 추리 능력이 구축되려면 기억력과 균형을 이룰 망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감성적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는 독창성 개발을 위해 망각은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때로는 부담 없는 잊음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미증유의 정답을 얻은 것이다. 적당히 잊고 적당히 기억해야 하는 밸런스 유지 필요성을 확인한 한 셈이 된다. 의식과 자유의지 실체 또한 뇌 세포에서 발원된 것이라서 기억과 망각의 강은 같은 발원지에 근원을 둔 원천에서 흘러온 것 같다.
생각을 모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쓸 수 있는 기능의 노화로 인해 건망증이 발생하게 되는 것인데 지난 시간과 지금을 이어주는 기억 장치가 순조롭게 임무 감당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깜빡이 신호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과로나 긴장감, 스트레스에서 온전히 벗어날 순 없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나친 혹사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현대라는 시대를 살아가노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면서도 혹여 치매 과정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하는 것이라서 건망증과 치매 차이가 관건이긴 했다.
알츠하이머나 기억상실증같은 병적인 망각은 이를 관장하는 뇌기관이 다르기 때문에 건망증은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면서 건망증 개선을 위해 기억과 망각의 거리두기를 꾸준히 시도해보려 한다.
잊음이 없는 뇌는 없다. 기억과 망각의 강은 생각의 홍수와 가뭄에도 말없이 쉼없이 흐르고 있다. 잊음의 여울목을 맴돌고 맴돌아 구비구비 흘러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