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고층 주거지에서 살아가는 멋 중 하나가 일몰 이후 만나지는 도시의 밤 풍경이다. 지상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정경과는 차별화된 야경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평소 발견하지 못했던 유난한 불 빛이 등장하면 깊은 밤 드라이브도 불사하게 된다. 한적한 밤 거리를 돌아오다 보면 야경의 함축된 추론이 감지된다. 밤 풍경의 화려함 만이 도시의 전부가 아니라고. 해서 인지 야경 앞에선 차분해지고 신중해지게 된다. 차가운 세상을 향해 낮 동안 풀어내지 못했던 도시의 언어를 마저 토해내고 있는 것 같다. 달빛도 무색해진 유광한 불빛을 타고 환한 빛 줄기로 두런두런 번져간다. 야경을 탐색하기 힘든 마성을 품고 있다. 낮 시간에 만났던 도심 빌딩들을 밤 시간에 바라보게 되면 표정을 바꾸어버린 휘황한 빛의 향연을 연출한 밤의 얼굴에 압도 당하고 만다. 태양빛으로 하여 일하지 못했던 어둠이 제 능력과 값어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도시의 낮 시간은 질주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인간사를 다룬 것이라면 야경은 별빛과 달빛으로 환골탈태한 빛살을 담아내는 것이라서 기필코 누구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일몰 앞에 서면 하루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고 난만한 빛 줄기를 꽃피울 수 있는 밤이 있어 알차고 실한 감격을 맞게 된다. 야경이 있어 행복하지 않으신가요. 대낮처럼 구석구석 다 보이지 않아서 좋지 않으냐고. 지금을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믿고 다짐하란다. 인생은 생각 보다 아름답고 감사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지혜가 닿지 않아도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줄 수 있지 않느냐며. 밤의 마음을 내비치는 야경은 도시인의 뒤엉킨 삶을 풀어내기도 하고, 고달픈 일상을 빌딩 사이를 휘돌고있는 바람의 마음을 읽다 보면 위로를 얻을 것이라 당부하듯 시사해준다.
밤 모습은 청춘이다. 유년도 아니고 노년도 아닌 생의 최고조의 정점을 찍는 젊음의 표정이 숨쉬고 있다. 기발함, 민감함, 풍성함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는 이끌림이 있다. 어둠의 배경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다가서는 안개 같이 휘감기 듯 스며드는 밤 기운이 그럴 수 없이 평온하다. 세월은 알고 있을까. 밤 풍경은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을. 세상을 건너가기 위한 구차한 생존을 비켜갈 수 없음을 깨달은 야경은 어차피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을 인정받기 위해 어둠을 배경 삼은 거리에서 무던하게 보이려 애쓰는 애틋함이 엿보인다. 낮 시간 동안의 쓴 맛을 삼키는 침묵과 사색에 관여하지 않는 야경의 아름다운 배려가 사랑스럽다.
창마다 거리마다 환하게 밝혀진 불빛은 도시가 만든 이야기를 풀어내려 먼 별빛과 눈 인사를 나눈다. 밤 풍경은 주어진 시간을 보내야하는 초조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여전한 촉수로 눈부신 빛살을 뿜어내고 있다. 인공 광원이 연출해낸 경관이 도심 불 빛을 담고 살포시 떠있는 섬처럼 우아하다. 빌딩마다 환하게 불빛을 토해내고 있지만 도시의 화려한 불 빛이 어쩌면 유혹일 수도 있겠다 싶어 휘황한 불빛은 눈부신 만큼 스쳐 지나가시라고, 외면해도 될 불빛 일랑 길잡이나 이정표로 삼지는 마시라고. 방금 만난 밤의 얼굴이 위압적이면서 위풍당당 위엄으로 경고한다.
야경에 몰입해 있노라면 어느 결에 세모 풍경을 만난 듯 차분했던 심사가 슬며시 행복한 나들이를 한 것 마냥 설렘으로 마음이 달뜨고 흥분되기도 한다. 어느 땐 야경을 만날 채비를 하곤 한다. 밤 기운에서 느껴질 어두운 맥을 붙들고 조갈나는 마음 빈자리를 채워볼 양으로 야경 나들이를 나설 때도 있다. 하루하루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창마다 흘러 나오는 불빛에 도취된 듯 자아는 넋을 잃을 만큼 현란하다. 한 폭의 그림처럼 출렁이는 불빛의 찬란함에 더욱 깊은 심연의 아름다움에 잠기게 된다. 빛부신 찬란한 야경의 아름다운 자태는 활기 가득한 역동성의 방류이다. 인공의 빛이 석양을 삼켜버린 깊은 하늘은 착잡한 심정이 되어 어스름이 스며들어도 방관해 버린다. 하지만 빛결이 춤을 추는 곳은 어두운 곳일 수 밖에 없는 것이라서 인생사 파노라마가 야경으로 펼쳐질 수 밖에. 화사한 밤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세상 사는 멋과 맛을 한번 쯤은 마음껏 만끽하자고 제안해볼까 싶다. 세상은 언제나 할 일이 남아 있고, 불안과 후회와 아쉬움이 삶의 열정을 가로막고 있지만 밤 풍경으로 만난 지구별 민낯이 내밀한 도취감으로 황홀하기 그지 없어 이 밤의 야경을 향해 ‘어메이징’ 을 외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