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도움>이 갈급한 시대입니다. <도움>이 긴급한 상황입니다. <도움>이 절실한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절체절명(絶體絶命)> 내지는 <존망지추(存亡之秋)>라 합니다. 그런데, 이 위기상황에 하나님께서 <궁즉통(窮卽通)>의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궁지에 몰려 살아날 길이 전혀 없는 상황은 결코 흔하지 않은 특별한 상황입니다.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 사느냐 죽느냐의 고빗사위가 가장 절박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궁하면 통하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시121:1).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눈을 들어 산들을 보라!”는 메시지입니다. 위기 앞에서 계속 위기를 쳐다보게 되면 해답이 없습니다. 리차드 바크의 작품, “갈매기의 꿈”에서 평범한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이 비상(飛翔)의 노력을 통하여 마침내 터득하는 <혜안(慧眼)의 축복>을 다음과 같이 피력합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이 <평범하고도 소박한 진리>가 우리에게 도전하듯이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이 세상 어디에나, 어느 시대나 끈질기게 우리를 급박하고 몰아세운다는 사실을 인지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창공의 비상>, 바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눈>이 있습니다. 현실만 바라보고, 절체절명의 위기만 바라보고, 존망지추의 궁극적 상황만 바라보게 되면 그 해결책은 없습니다. 산 넘어 산이 있듯이 도전적인 상황은 끊임없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좌절하고 그때마다 낙망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살아계신 만군의 주 야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라는 존재가 홀로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서 있으려 발버둥치면 <나>는 사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순간, 높은 창공을 날아올라 눈 앞의 현실이 주는 <맥 빠진 위기>를 넘어서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혜안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시편 121편의 핵심입니다. 수정같이 맑은 논지로 우리에게 <새 힘>, <새 활로>를 제시하십니다. <갖가지 위기의 모양>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산들>이란 말로 압축하십니다. 위기의 대소를 막론하고 그 위기는 천국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찾아올 <정체불명의 도전들>이기에 하나님은 그 위기에서 건져주시겠다고 <약속 지킴이(Promise Keeper)>로서 야훼의 정체를 <하늘과 땅을 걸고 맹세하십니다>. “너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야훼께서로다!”(시121:2)
“지켜주겠다” “분명히 지키겠다” “기필코 지키겠다”는 것을 NIV성경은 세 단어로 압축합니다. “Keep”, “Watch Over”, “Not Harm” 한글성경은 지키겠다는 말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영문성경은 원어인 히브리어의 의미를 그대로 살려서 우리에게 더욱 선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로 8절에서 여섯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꾸준히 변함없이 지켜주겠다”, “눈을 부릅뜨고 지키겠다”, “결코 해를 끼치지 않겠다” 이 말씀의 증거가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야훼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며 너를 지키시리로다.”(3절~6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구주>, <인생의 동반자>이신 야훼께서로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 결코….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