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4)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5-16)
한 세대가 저물어 가는 이때에는 코로나 이전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도래한 “위드 코로나” 시대의 현실에서 새로운 도전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 같다.
코로나 재앙의 경고 가운데서 어떻게 미래를 향해 담대하게 나갈 것인가.
하나님께서 코로나의 파괴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도우시는 한결같은 사랑에 소망을 품게 된다.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어낼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을 얻기를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인도하시는 깊은 뜻을 헤아리며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받아들여야 한다.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통찰력과 결단이 따라야 하겠다.
신선한 변화의 물결을 따라가는 간절함은 미래를 향해 열린 사고 체계의 치열함이 있어야 하리라. 삶 가운데서 만나는 위선의 실체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왔다.
작금의 국내외의 현실은 우리가 지녀왔던 역사관, 가치관의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무엇이 참이며 정의이며 선인지 분간하기 힘든 세태의 만연된 무질서를 경험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나라로 패러디가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위태롭게 하는 국가 정책의 혼선은 국내외적으로 도전받는 힘든 시기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인간 자유 정신을 억압했던 지배체제에 의해 법치주의가 파괴된 사회에는 긴 어둠이 드리워졌다.
보편적인 절대 가치 기준인 규범이 무너지고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정신의 황폐화를 불러왔던 암울한 기간이었다.
이념에 함몰되어 증오를 부추긴 편 가르기 식의 폐쇄적인 사회는 인간 기본권을 침해했다.
절대주의 진영의 논리는 인간 존중의 고귀한 사랑의 감정을 야만적인 잔인한 증오의 감정으로 키운 사회였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도다”(스가랴 14; 7)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어둠의 세력은 빛에 의해서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가.
지도자가 자신의 잘못된 신념에 충실해 겸허함을 잃게 되면 오만과 독선에 빠져든다.
이는 개인이든 지도자이든 간에 불행(비참)해진 역사의 교훈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하리라.
역사의 영속성을 부정하는 퇴행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1923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는 이미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이렇게 갈파했다. 그의 시 “재림”(The second coming) 중에서 “사물은 분열되어 있고, 중심은 유지될 수 없고 단지 무질서만이 세상에 널려 있도다” 균형을 잃은 혼란한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다.
삶의 모순과 무질서 가운데서 조화의 과정을 찾기 위한 성찰과 균형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 혼탁해진 영혼과 삭막한 내면을 소생시켜야 할 과제가 우선이 되어야 하리라.
자신의 정체성과 잃어버린 자존감이 회복되며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가 형성되어 사랑의 감정이 살아나길 원한다.
평소에 사랑을 실천하는 인내의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의 무례한 모습을 보게 되는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고전 13:4-7)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은 절대적인 인내와 희생적인 사랑의 송가가 아닌가.
사랑의 감정을 끊임없이 키우는 훈련은 자신을 지키는 힘겨운 영적인 싸움일 것이다.
자신의 지친 영혼과 내면의 황폐함을 풍요롭게 하는 기쁨은 사랑의 감정을 키우는 훈련에 의해서이다. 거짓된 삶의 황폐함에서 벗어나 순수함이 회복되는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겠다.
고결한 영혼을 위한 사랑의 송가가 삶을 아름답게 가득 채우는 순간을 말이다.
변화를 절실하게 원하는 자신의 진지한 노력과 깨달음이 삶의 아름다움과 감성을 일깨운다.
인간 삶의 새로운 출발은 어디서부터 가능한 것인가? 삶의 한가운데서 겸허한 성찰과 치열한 기도를 통한 올바른 삶의 적용에서이다. 새로운 삶의 도래에는 신선한 열망이 경이로움으로 살아나기를 바란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은 장엄한 해돋이처럼 찬란한 감격의 순간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