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C. S. 루이스는 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 관하여, “모든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인류 전체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목숨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인생이 얼마나 짧고 위태롭고 덧없고 무상한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이 좀처럼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이 세상을 사는 인류 전체의 수명도 위태롭고 덧없고 무상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시대를 살았던 초대 교회 사도이면서 신약교회의 중심이 되는 말씀의 최고 전문가입니다. 그는 지금의 신약교회가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이 한 구절,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즉”이라는 이 접속사의 의미는 “그러므로”라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결론적으로 “결정의 의미”를 부여할 때 쓰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시간표가 “얼마나 짧고 위태롭고 덧없고 무상함”을 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한 단어로 압축하여서 “그런즉”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인생은 참으로 짧고 위태롭고 덧없고 무상하므로 바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깊은 뜻이 “그런즉”이란 짧은 접속사 속에 스며 있습니다.
C. S. 루이스가 자각했던 <인생무상>, 사도 바울이 영적 대각성의 깨달음으로 깨우쳤던 <세상종말> 이 두 가지 위대한 가치를 생전의 예수 그리스도가 <연약한 인생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앞에서 하신 말씀이 오늘 고후 5:17의 말씀에 결정적인 해답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 사람은 <일의 굴레>에 늘 빠져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생들이 가장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일의 우선선위>를 잘 모르고 <일의 굴레>에서 허우적대고 산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일의 굴레>에 빠져서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분별하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시며 질책하셨습니다(마 16:23). 인생무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바로 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굴레, 일의 굴레,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는 첩경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는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는 말씀은 사람은 한 번 세상에 나오면 반드시 죽지만, <생명과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삶의 무상함은 없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입니다. <부활 예수의 생명 선언문>은 오늘 이 시대가 마감할 날이 다가온 <종말>이 “이미” 와 있다 할지라도, “아직”은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인류가 <새로운 창조(New Creation)>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삶이 짧고 무상하여 덧없는 <공허감>을 준다 할지라도 이 공허감을 뚫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다. 20만배의 무게를 견뎌내고 봄꽃이 대지를 뚫고 나와 꽃을 피우듯, 메가 톤 급으로 눌렀던 <죄와 죽음의 무게>를 <생명과 부활>의 꽃을 피우신 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지 말라!”(사43:8). 물고기는 물 안에 있어야 삽니다. 나무는 땅에 있어야 삽니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삽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그리하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