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겨울의 찬바람 부는 거리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다.
아침 늦은 시간에 둘루스 플레젠트 힐 로드를 지날 때 노숙자(Homeless)가 거리 모퉁이 벤치에서 이불을 겹겹이 뒤집어쓴 채, 잠자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추운 겨울밤 시간에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거리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 노숙자를 생각하면서 미국 사회에도 명암이 있다는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가 선택한 잠자리의 벤치가 유명한 스테이크 쉐이크 앞이라는 점이 아이러니라 할까?
이 추운 겨울의 한파 속에서 새벽의 찬 서리 내리고 엄습해오는 냉기에 제대로 깊은 잠이 들 수 있을까? 추운 겨울의 긴 밤 속에서 그는 어떤 기도를 청할까? 매서운 칼바람을 잠재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을까? 잠자는 동안 비바람을 맞지 않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어떻게 피할 것인가. 속수무책일 것 같다. 그것은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오늘도 겨울의 찬바람 부는 거리에 밤이 깊어가고 있다. 그는 밤늦게 통행하는 자동차의 소음을 자장가 삼아 들으며 애써 잠을 청하는 것일까?
노숙자가 잠자리를 마련하는 도로를 지나면서 마음에 어둠이 깃드는 것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아 우울해진다.
어느 나라 사회에도 홈리스는 어둠의 한 단면임을 부인할 수가 없는 문제가 아닌가?
노숙자를 수용해 돌보는 사회복지기관 사설 지원단체, 재활센터가 있다. 음식을 제공하며 구제하는 종교구호단체의 손길이 있음에도 노숙자는 계속 늘어가는 추세이다. 어쩌면 이 문제는 말하기 쉽지 않은 영역이다.
구제 차원의 측면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그들이지만 본인 삶의 태도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1960년대에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실린 Henry Bishop 작곡 의 가곡 작사자 홈리스였던 John Howard Payne를 떠올리며 돌아갈 집이 있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귀가하고 있다.
자신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이기적인 기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진다.
아침 늦은 시간에 그에게 다가가 햄버거를 건네며 대화에서 알게 된 사연은 자유스러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중년의 흑인이었다. 그는 한쪽 다리의 심한 신체장애가 있어 일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선한 얼굴의 표정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지 않았다.
그가 경제적인 취약함과 현실적인 고통으로 인해 상실감과 불편함은 있으나 그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의외로 자신이 선택한 삶이 코로나 때문에 조금 힘든 것이라고 했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그가 힘든 처지(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행복의 척도는 결코 물질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기회가 되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삶을 단순화시키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이 값싼 동정심이나 치기가 발동하는 자기중심적인 행위가 아니길 바란다.
그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길 바라며 그 자리를 떠났다.
따뜻한 감정으로 바라보았던 시선을 어느 한순간에 이내 거두어들이고 있음은 자기애의 한계성에서 벗어나지 못함이니라.
이 시대의 어둠의 한 단면인 노숙자의 삶을 조명한다는 것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도 쉽지 않은 문제임을 절감한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그가 약함의 자리에서 정신적인 강인함을 키우는 계기가 되어 고난의 그 자리를 속히 떠나길 바란다.
이 시대의 어둠인 노숙자의 삶도 존중받아야 할 삶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거리로 내몰린 홈리스가 나타나고 있는 실상을 고려하여야 할 것 같다.
홈리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요구되는 어려운 현실임을 받아들여 개선해야 할 과제이다.
그가 영적인 담대함으로 현실적인 연약한 부분을 회복해 실존적인 건강한 삶을 찾길 바란다.
우리가 자신이 원치 않게 직장을 잃는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때 어느 한순간 홈리스로 내몰릴 수 있다는 심각한 상황을 깊이 생각해야 하리라.
그는 오늘 이 시간 밤거리를 품고 잠들어 있을까?
The World in His Arms. 그는 세상(계)을 품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