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희 논설위원
델타 항공의 최고경영자 에드 바스티안이 지난주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기내에서 난동을 부리는 승객들을 기소하고 탑승금지 명단에 올려달라는 요청이었다.
항공사가 진상 고객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여름에는 아메리칸, 델타, 유나이티드 등 주요 항공사들이 갈런드 법무장관에게 공동서한을 보내 같은 요구를 했다. 하늘 위 기내에서 승객이 난동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들이 너무 자주 발생해서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연방항공청(FAA) 데이터에 의하면 2021년은 기내 난동 최악의 해였다. 무려 5,981건이 보고되었다.
팬데믹이 지난 2년 동안 우리의 삶의 모습을 많이 바꿔 놓았다. 그중 하나가 사회 전반에 퍼진 무례함이다. 과거 미국은 시민의식이 높은 나라로 인식되었다. 70~80년대 이민 초기 한인들이 감탄한 것이 있었다. 관공서나 은행에 가면 아무리 오래 줄을 서서 기다려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상점이나 식당에서는 손님들도 종업원들도 그렇게 나긋나긋할 수가 없었다. 속마음이 어떠하든 겉으로는 매너 있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이 사회의 암묵적 약속이었다.
그런 정중함이 미국에서 사라지고 있다. 대신 무례함이 들어섰다. 공공장소에서 소리 지르고 막말하고 주먹 휘두르는 무례한 행동들이 늘고 있는데, 특히 팬데믹 이후 심해졌다. 식당에서 손님들이 웨이트리스를 구타하는 가하면, 초등학생 엄마가 스쿨버스 기사의 따귀를 때리고,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종업원이 온라인 주문을 요구하자 이에 열 받은 손님이 총을 빼들기도 했다. 지난해 매서추세츠의 한 식당은 24시간 문을 닫았다. 손님들의 무례가 도를 넘어서 종업원들에게 숨 돌릴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전에 없이 성마르고 거칠어졌고, 목까지 차오른 짜증을 종종 서비스직 종사자들에게 터트리고 있다.
코비드-19 감염 불안, 봉쇄 폐쇄 격리 등 낯선 생활로 인한 좌절과 혼란이 정신건강을 해친 탓으로 일단 받아들여진다. 아울러 장기간의 단절과 고립, 상실감은 스트레스 요인이 되고, 우리 몸은 이를 위기상황으로 인식한다는 분석이다. 위기라고 느껴지면 ‘도망 아니면 싸움(Flight or Fight)’ 본능이 발동하는데, 이중 후자가 작동되면서 사람들이 툭하면 싸우려 드는 것 같다고 심리학자들은 분석한다.
거기에 한가지가 추가되면서 무례함은 전염병처럼 창궐하고 있다. 정치 혹은 이념 갈등이다. 팬데믹은 마스크와 백신 전쟁을 불러왔다. 선동가 트럼프의 영향이 크다. 극우진영이 마스크 착용이나 백신접종을 보건문제가 아니라 정치이슈로 받아들이면서 사방에서 반대진영과 충돌했다. 지난여름 LA 시청 밖에서는 마스크 찬반 시위대가 격하게 부딪치면서 한 남성이 칼에 찔렸다.
기내 난동도 대부분 발단은 마스크이다. 마스크 착용 규정을 지키라는 승무원, 이를 ‘권리침해’ ‘부당한 규정’이라며 반발하는 승객이 충돌하면서 소동은 벌어진다. 분노한 승객들은 폭언을 하고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사우스웨스트 승무원은 승객의 공격으로 치아 여러 개를 잃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달 오렌지카운티에서는 백신반대론자였던 40대 여성검사가 코비드로 사망했다. 그는 물론 백신을 맞지 않았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소셜미디어가 불이 났었다. 보수진영은 그를 영웅이라고 치켜세웠고, 진보진영은 스스로 자초한 죽음이라며 비아냥거리고 고소해했다. 익명성에 기댄 온라인 상의 무례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백신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고 망자에 대한 기본적 예의마저 버려야 했을까. 무례도 그런 무례가 없다.
예의 혹은 정중함은 사회적 유대감에서 나온다. 과거 한국에서 우리는 어른을 만나면 예의를 갖췄다. 낯선 어른에게도 공손히 인사하고, 무거운 물건을 대신 들어드리는 일들이 자연스러웠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공동체 의식도 사회적 유대감도 약하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 대 ‘그들’로 갈라졌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 민주당과 공화당은 원수처럼 싸우고, 부유층과 근로계층 간 격차는 날로 벌어져 경제적 불평등이 깊다. 불평등이 심화할수록 사회경제적 계층 간 거리는 멀어지고 유대감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무례함을 팬데믹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보다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사회적 화합이 깨진 것이다. ‘우리’가 아닌 ‘저들’ 혹은 ‘그들’에 대한 적대감, 무시, 분노가 너무 깊다. 그런 환경에서 무례함은 독버섯처럼 퍼진다. 무례가 무례를 낳으면서 사회 전체가 불쾌함으로 가득해진다.
날로 거칠고 무례해지는 사회에서 어떻게 예의를 회복할 것인가. 답은 황금률이다.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각자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나부터.
<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