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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눈꽃 여백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2-01-21 07:42:15

행복한 아침, 김정자(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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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시인·수필가)                                       

 

첫눈이 내렸다. 세상이 눈부시다. 흰 눈이 만상을 덮기 시작하자 빈 가지마다 소복소복 눈이 쌓인 풍경들이 프레임 가득 생경하고 거대한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온 마을 풍경이 그림 엽서 모델이 되기도 한다. 하염없이 거침없이 내린다. 궁창을 맴돌다 허공에서 머뭇거리며 나목 곁에 서성이다 못내 덧없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몸부림처럼 들판으로 나뭇가지 위로 내려 앉는다. 만상 위에 발을 내딛는 순간 형체없이 녹아내려 발에 채이기도 하고 대지에 스며드는 부질없는 흐름이 두려웠을까. 사박사박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아픈 신음이었나보다. 지인을 떠나보낸 회의감과 절절한 아쉬움이 다스려지지 않는 내 마음처럼.

눈이 내려앉는 소리 없는 울림이 처연한 그리움 자락이 되어 내려앉고 있다. 애석함에 마음을 두게 되고 잊혀지지 않는 사념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렇게 덧없이 가실 줄은 몰랐다. 

신년 특별 새벽기도회 기간 첫날 성전을 찾아 나서다가 심한 두통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는 그 길로 중환자 실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격렬한 경계에서 혼수상태로 며칠을 보내다 하나님 부르심을 받고 홀연히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남은 자의 몫이 아무리 애닯다 한들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 두고 떠나시는 권사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그토록 아득하고 험했던 길 저 너머에 비로소 안식의 땅에서 이렇듯 눈꽃이 피어나는 추억의 동산을 내려다 보고 있으시리라.

권사님 ‘수첩 가득 채워져 있던 간곡한 기도제목들에는 이제 더는 연연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따님들이 독실한 믿음 그대로 간직하셨다가 훗날 천국에서 어머님 뵈올 때 부끄럼 없는 만남을 저랑 약속했거든요. 멀지 않은 Crowell Brothers Cemetery 권사님 누우신 자리 위에도 하얀 눈이 쌓였겠네요. 톱 연주가로 활동하시면서 구성지고 은혜로운 찬송가를 연주해주셨던 아버님께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쳐오신 독립 운동가의 딸로 태어나 믿음 깊은 신앙을 키워오시면서 세 따님의 아버지를 만나시고 이민 길에 오르시면서 애틀랜타에 정착하신 계기로 우리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딸만 키운다는 공통점으로 하여 삼십 년을 넘기는 인연을 이어왔던 게지요.

그 날 카페에서 커피 타임을 가진 것이 어찌 마지막 시간일 줄 알았을까요. 성가대에서 짝궁 자리를 오래도록 지켜왔던 일들도 이젠 햇살이 다사롭거나 비가 내린다는 사유로 순간순간 떠올려지는 추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시고 이별 연습도 없이, 아직은 이르다 싶은 날에 홀연히 천국으로 삶을 옮겨 가시면서 이별식을 치루었네요. 

혹한을 견뎌내고 냉랭한 추위 속에서 삶의 잔해들을 추억이라는 미명으로 곱게 덧입혀주는 하얀 눈이, 못다한 온정으로 은혜롭고 성스러운 위로를 건네주고 있습니다. 천지간 온갖 슬픔과 서러움, 오욕까지도 포근하게 덮어주고 있기에 비애감보다 조금 앞서가신 서운함만 동그마니 남겨지기를 기도 드리게 된답니다. 눈꽃이 만개한 뜨락에 서서 아직도 생생한 님의 모습이 와이드 앵글 콘티처럼 겨울 들판에 가없이 하염없이 맴돌고 있답니다.

눈꽃을 피워낸 여백들을 이방인으로 살아내야 하는 질척이고 무거웠던 삶에 눈부신 조명이 되어 고단했던 삶 구석구석을 쓰다듬어 주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순백의 포근한 눈송이가 창공을 가르며 하늘 특사처럼 뭇 인생들에 실어 나르는 전언을 듣습니다. 영생의 언약을 기억하며 마지막 떠남을 준비하는 남은 날들로 채워가라는 하늘 전언이 이토록 명징하게 가슴을 울릴까요. 유독 분주했던 것도 아닌데 무수한 날들 동안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외면해왔던 부끄럼이 님과의 이별을 나누면서 얻게 된 뒤늦은 깨달음까지도 하얀 눈꽃의 호의로 용납해주고 싶어집니다.

하늘에 소망을 둔 성도의 반열에서 실격에 가까웠던 아웃사이더적 행위들을 님이 소천하신 아픔 앞에서 하늘가는 밝은 길을 흔들림 없이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걸음으로 집중하며 준비해가려 합니다. 천체의 광년에 비하면 찰나같은 시간을 보내고 우린 곧 만나질 테지 하는 소망이 투명하게 피어나는 눈 내리는 날입니다. 하얀 눈은 님이 계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건의 마음이라 여겨집니다. 다른 계절이 가질 수 없는 눈꽃 여백을 품으며 소망을 향한 겨울 꿈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천국 소망을 품을 수 있는 헤어짐으로 우린 서로 이별을 나누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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