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아름다운 소식”은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그리스병사의 마라톤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 마라톤 광장에서 벌어졌을 때 마침내 그리스가 승리하게 된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페이디피데스가 전력으로 달려 로마의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한 데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페이디피데스라는 한 사람의 전력투구의 결과로 마침내 승전보의 아름다운 소식이 전파되었듯이 예수님 탄생 700년전에 이사야라는 한 사람의 선지자가 예수님 탄생 훨씬 이전에 이 아름다운 소식을 온 인류에게 전하였습니다.
왜 아름다운 소식인가? 이사야는 이사야 41:27과 사52:7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사41: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 두 구절이 바로 아름다운 소식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입가에 미소를 가져오게 하므로 아름다운 소식인 것입니다. 둘째는, “평화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식임을 이사야는 상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이 로마 시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준 것처럼, 이 땅에 평화와 구원을 주시려고 찾아오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린 “이사야”는 21세기의 오늘 “With Pandemic”의 시대에 이 모든 환난과 근심을 없애주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탄생을 알리는 것은 복음 중의 복음, 기쁜 소식이기에 여전히 “아름다운 소식”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히브리어 단어는 단수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므바세렡” 영어로 표기하자면 “Herald of Good Tidings”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선구자라고 표기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자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 외롭고 고독한 길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많은 군중들이 환호하고 반기는 자리가 아닌 아주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 말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 작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어찌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소식이 장차 온 인류를 “평화와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메시아의 탄생이기에 이사야는 “아름다운 소식”, “기쁜 소식”이라 전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고 말씀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자는 높은 산에 오를 수 없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는 사람은 높은 산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산을 오를 수 있습니다. 높은 산을 오르게 되는 순간,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게 되는 순간은 높은 산을 오르는 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마라톤의 역사 주인공, 페이피데스처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선구자처럼, 오늘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나를 향하여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보기 위하여 “아름다운 소식를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